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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남미녀모친 Dec 23. 2023

왜 제주도에 오셨어요?

(슬기로운 난임생활)

  아침에 늦잠을 잘만도 한데 눈은 잘도 떠졌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올레길을 찾았다. 올레길 시작점에서 기념품가게를 발견했다. 오픈하기를 기다렸다가 손수건을 한 장 샀다. 갈색톤 테두리에 올레길 지도가 그려진 손수건이다. 손수건을 꺼내서 목에 걸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뒷목이 탈까 걱정이다.


  바닷길을 따라 걷다가 동네 골목길, 도로 옆길, 다시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걸었다. 목마르면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차 한잔 하고, 동네 사람들이 추천하는 식당도 가본다. 어제는 버스정류장에 서 계시던 할머니에게 식당을 물어봤었다.

"할머니 이 동네 고기 맛있는 집이 어디예요?"

  몇몇 동네분들이 고기를 굽고 있었던 식당에서 나도 단백질로 충만한 저녁을 먹었다. 이틀 전 제주도 목욕탕에 갔다 오더니 이제 동네 할머니에게 맛집을 묻는 수준이 되었다.




  제주 올레길이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6월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걷는 사람은 적었다. 바닷가 동네를 굽이굽이 지나서 돌무더기를 걷다가 사람을 봤다. 다행이다 싶어 거리를 두며 걷다가 어느새 인기척이 들릴만큼 가까워졌다. 큰엉 가기 전에 가파른 돌더미를 올라야 하는데, 앞서 걷던 분이 "도와줄까요."라고 말을 걸었다. 나는 "괜찮아요." 하며 혼자 돌무더기를 올랐다. 큰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다가 다시 인사를 하게 되었다. 서로의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근처에 앉아 잠시 쉬었다.


" 왜 제주도에 오셨어요?"


그분은 직장인이라고 했다. 인사 시즌인데, 자기 팀원 중 정리해야 할 사람을 보고하라는 메일을 받았다고 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상사에게

"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연차를 내겠으니, 알아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무작정 제주도로 왔다고 했다.

" 출근하면 제가 잘렸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자를 사람을 제 손으로 못 고르겠더라고요."

내 이야기도 꺼냈다.

" 저는 결혼한 지 5년째예요, 아이가 생기지 않아 휴직을 했어요. 일을 좀 쉬면 될 줄 알았는데, 요즘 계속 잠이 오지 않아서 내려왔어요. 몸이 힘들면 잠이 오지 않을까 하고요."


  대화는 길지 않았다. 고민을 안고 제주도로 다. 그리고 낯선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서로를 모른다. 고민은 주변 사람 누구나 알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편했다. 혼자 여행을 하는 사람 저마다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 그 고민이 각자에게 제주도를 떠올릴 만큼의 무게를 지닌 것이었을 것이다. 낯선 이에게 그저 한마디 뱉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짐이 덜어졌을 것이다.


  그 분은 다음 주 출근을, 나는 불면증을 이야기했고 서로 잘 될 것이라 격려를 주고받았다. 조금 더 걷다가 동백나무 군락지에서 길이 나뉘었다. 귤밭을 지나 쇠소깍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람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하다 버스 타고 숙소로 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 섰다. 한라산 성판악 정류장을 지나, 사려니 숲길을 지났다. 기억이 되감긴다. 그리고 다시 출발한 곳으로 돌아왔다.



  

  여행에 돌아와서 냉동이식을 준비했다. 냉동 난자의 상태도 최상이었고, 나도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다태아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임신 확률을 높일 생각으로 최상급과 상급 배아 2개를 이식했다. 일주일 뒤 피검사를 받았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눈물이 마를 만큼 다 울었다. 그리고 담당 선생님께 이야기했다.

" 저 이제 인공수정이랑 냉동이식 그만하고 바로 시험관 하고 싶어요."


  그리고 복직 신청서를 직장에 제출했다. 일을 하는 시간 동안 아이를 갖고 싶다는 그 생각을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복직하기 전 남편과 계룡산과 치악산에 올랐다. 그 중 코스 난이도 보통이라고 고른 치악산은 그동안 주변 산을 오르내리며 꾸준히 운동했던 나에게도 힘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갔다 왔다.


  복직 후 직장을 다니며 시험관을 진행했다. 난임병원에 앉아있는 모두가 동지 같았다. 내 손으로 몸에 주사를 놓기가 무서워 이틀에 한번 근처 산부인과에 주사를 맞으러 다녔다.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산모수첩을 들고 초음파 사진을 보는 사람들을 애써 피하지도 않았다. 아이 울음 소리에도 담담했다. 주사 맞은 부위는 며칠간 딱딱했고 시퍼런 멍이 들었지만 괜찮았다.


  첫 번째 시험관 시술 결과는 좋지 않았다. 병원을 나서며 계산을 하는 나에게 이제는 낯이 익은 원무과 직원들이 위로를 건넸다. 나는 "괜찮아요. 다음 달에 올게요."하고 웃었다. 다음 달에도 시술할 수 있는 몸 상태가 고마웠다. 난임 병원은 집에서 멀다. 조퇴를 하고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가서 또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주말에 두 시간 대기는 기본이다. 하지만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병원 다닐 수 있는 현재에 감사했다.


  그리고 11년 전 11월 두 번째 시험관을 했다. 일주일 뒤 병원에서 의사도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애매한 피검사수치를 받았다. 일주일 뒤에 한번 더 와서 피검을 하자고 했다(보통 수치가 높으면 2주 뒤에 오라고 하고 낮으면 다음 달에 보자고 한다). 그리고 평범한 7일을 보냈다. 토요일, 앉을자리가 없는 병원에서 피만 뽑고 밖으로 나와서 근처 카페에서 남편과 연락을 기다렸다. 한 시간 뒤에 검사 결과를 들으러 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리고 병원에 다닌 지 일 년 만에 첫째를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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