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돈 많은 중학교 친구
(내가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
아빠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나서 자수성가했다. 자수성가라는 게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어릴 적부터 갖고 싶었던 땅에 농사를 지으시고, 지금은 매달 받으시는 연금보다 많은 돈을 다양한 파이프 라인으로 버신다. 과수원을 하시며 관상수도 가꿔서 팔고, 달러 투자로도 쏠쏠히 돈을 버신다. 상고를 나와서 19살 때부터 30년간 공무원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동기들 중에 그래도 안정적이고 마음 편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런 아버지의 친구 중에 찐 부자가 한분 계신다. 이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분은 이틀에 한번 아버지와 만나서 딱 한 시간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고 집에 가신다. 어머니가 이 분을 좋아하는 이유가 주사가 없고, 식사 자리가 깔끔해서이다(아버지는 술을 같이 먹는 분의 주사를 닮는다. 예전에 아빠가 고성방가와 노상방뇨를 하는 분과 잠깐 술친구를 했는데, 아빠가 고대로 따라 해서 엄마가 속을 많이 썩었다) 하지만 이 친구와 술 먹고 들어오는 날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분과 식사를 하고 오면 나에게 늘 "오늘도 000랑 술 먹고 왔다." " 00는 나를 제일 부러워해."라고 하신다. 지역 최고부자가 자신을 부러워한다는 것에 아버지는 신나 하셨다. 아버지를 부러워한다는 그분의 삶의 일부분을 나도 들었다. 게다가 나도 5년 넘게 이 분의 덕을 많이 보았다. 생선을 좋아하는 둘째는 매 끼니때마다 고등어, 조기, 갈치 등을 해 달라고 했는데 이분이 갈치를 대 주셨다. 낚시를 좋아하셨던 아저씨가 바다낚시를 다녀오신 날에는 다음 날 아이스박스 가득 갈치를 잡아오신다. 하지만 아저씨의 집에는 먹을 사람도 손질할 사람도 없다. 아저씨가 낚시를 다녀올 때마다 친정에 그 갈치를 보내주셨다. 아이가 태어나고 5년 넘게 우리는 갈치를 한 번도 사 먹은 적이 없다. 가끔 갈치 대신 한치가 잡힌 날은 맛있는 한치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이 안주로 먹을 만큼만 빼고 나머지를 모두 주셨다. 그래서 나는 돈 많은 아빠의 중학교 친구를 갈치 아저씨라고 부른다.
갈치아저씨의 부모님은 중학교 때 모두 돌아가셨다고 한다. 사촌형이 이 분의 대학까지 학비를 모두 댔다. 사촌형은 교사였는데 똑똑한 사촌동생을 그냥 두기가 아까워서라고 했다. 이분은 대학을 졸업하고 약국을 열었다. 버스정류장 옆에 15평 남짓한 약국. 약국은 장사가 잘 되었다. 어느 정도 잘 되었냐 하면 집에 돈 세는 기계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매일 밤 번 돈을 미처 세지도 못하고 잠이 든 날도 많다고 했다. 돈이 모일 때마다 주변에 매물로 나온 땅을 사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땅에 종합병원을 세우고 대형 약국도 세우고 요양원도 세웠다.
그분에게 고민이 없었을까? 10년 전 어느 날 갈치아저씨는 아빠와 술을 드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의사를 구할 수가 없어. 한 달에 2천만 원을 준다고 해도 2년을 못 채우고 다 나가니..." 도시가 아니라 의사 구하기가 너무나 힘들다고 했다. 어느 날부터는 직원들 월급날이 무섭다고도 했다. 자기 병원에 일하는 사람들의 급여를 맞춰주려고 동분서주했다는 것이다. 지방의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지역에는 노인만 남았다. 병원보다 요양원이 잘됐다. 하지만 병원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하고 월급을 받는다. 병원을 그만두고 요양원만 하면 수익은 날 테지만 몇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실업자가 된다. 몇십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병원이라서 쉽게 정리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아저씨는 바다낚시를 갔다. 갔다 올 때마다 친정에 갈치를 두고 가셨다. 친구네 손주가 생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아저씨는 자기가 잡은 생선을 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가끔 아버지의 농장에 오실 때면 어머니가 밥을 차려드렸다. 갈치 아저씨는 엄마가 만든 밥을 정말 좋아하셨다. 엄마가 농사지은 재료로 집밥을 차려드리면 그 밥을 5분도 안 돼서 허겁지겁 다 먹었다. 아무 약속도 없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데 아저씨는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바로 삼켰다. 직업병이라고 했다. 밥 먹을 시간 없이 일을 해서 끼니를 거르지 않으려고 이런 식으로 식사를 했단다. 그 습관이 남아서 70이 넘은 이 돈 많은 아저씨는 모든 식사를 5분 만에 끝내버린다. 뜨거운 국이든, 고봉밥이든... 그 습관은 평생 고치지 못했다. 아저씨의 식성은 소박했다. 단골 식당에 잡아온 생선을 갖다 주면 식당에서 생선요리와 밥, 술을 내 온다. 그 술을 아빠 외에 다른 친구들과 종종 마시곤 했다.
갈치아저씨가 아빠를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아저씨에게 얻어먹으려고 했다. 돈이 많다는 이유였다. 100 사람과 만나면 100 사람 모두 이 아저씨가 밥을 사겠거니 하고 계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다음 식사 값은 반드시 아빠가 냈다. 그리고 당당했다. 몇 년에 걸쳐서 사람들은 갈치아저씨의 밥을 얻어먹었지만 돈 한 푼 내지 않았다. 차츰 그 사람들은 술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아빠가 제일 오래된 술친구로 남았다. 하지만 가끔 아빠도 피곤해했다. 농번기 때는 밤낮으로 바쁜데 이틀에 한 번을 불러내니 농사일이 많은 아빠도 봄가을은 술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빠가 술자리를 피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으면 다음날 오후에 아저씨가 벤츠를 타고 농장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거나 밥을 드시고 갔다.
아저씨는 자식이 셋 있다. 그중 하나는 나와 동갑에 같은 학교를 나와서 나도 좀 안다. 자녀 중 하나는 의사가 되었고 나머지도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아저씨의 고민은 재산을 믿고 물려줄 수 있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식이 능력이 모자라거나 사치를 해서 그런 게 아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은 별개다. 또 돈을 버는 것과 지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20년 전에는 돈이면 다 됐다. 자식의 학교도 결혼도 집도 직장도 돈만 있으면 다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관리할 능력은 돈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었던 아저씨가 평생에 끝내야 할 숙제 하나를 두고 계속 고민하셨다.
어느 날 갈치 아저씨는 가장 좋아하는 바다낚시를 다녀오신 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셨다. 아빠가 몇 번 병문안을 갔는데 마지막 병문안을 다녀오고 다음 날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는 "밥을 자주 해 드릴 걸, 반찬도 더 해줄걸." 하고 미안해하셨다. 아버지도 며칠간 마음이 착잡하셨는지 집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셨다고 했다. 나도 이 자리를 빌려 아저씨께 애도와 감사를 표한다. 그동안 아저씨가 보내주신 갈치를 먹고 아이가 무럭무럭 건강히 잘 자랐다고. 싱싱하고 건강한 갈치를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이다.
나는 갈치아저씨의 이야기는 부모님을 통해 종종 전해 들었다.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부자가 되길 바란다. 내가 돈을 버는 이유는 나와 가족이 경제적인 걱정 없이 살고자 함이다. 하지만 내가 모은 돈을 가족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삶과 자식의 미래가 송두리째 불안해진다.
경제적 감각과 능력은 돈으로 줄 수 없다. 내가 보여주든 가르치든 아이는 경제 감각을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영위하는 경제활동의 과정을 아이 수준에서 알려줘야 한다. 그 속에서 아이가 돈과 경제를 배울 것이다. 내가 상속해야 할 것은 돈보다는 경제 감각이다.(물론 돈도 주면 넌 참 좋겠지?)
P.S. 혹시 궁금한 분이 계실까 봐... 갈치아저씨는 어릴 적 자신에게 교육비를 대 준 삼촌에게 때마다 수십만 원짜리 선물을 보냈다. 어느 해는 공동명의로 건물을 하나 샀다고 했는데(말이 공동명의지 아저씨가 돈을 거의 다 댔을 것이라고 했다). 월세는 관리비 명목으로 삼촌에게 모두 드렸고, 나중에 건물을 매각한 돈도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삼촌에게 드렸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아빠에게 전해 듣고 최고의 투자는 사람에게 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갈치 아저씨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