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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남미녀모친 Dec 17. 2023

몸이 힘들어야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슬기로운 난임생활)

  난임 휴직 후 자궁 수술과 인공수정에도 피검사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한참 '아빠 어디 가'가 유행하던 때였는데 티브이도 보지 않았다. 지나가는 유모차만 봐도 슬펐고, 어디서 삑삑이 신발 소리가 나면 귀를 틀어막았다. 돈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저 임신이 되기만을 바랬다.


  시술에 실패하고 집에 틀어박혔던 어느 날부터 잠도 오지 않았다. 컨디션이 최상이어야 다음 달 냉동이식을 받을 수 있다. 삼일째 잠을 안 잤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불면증인가? 안된다. 잠이 오려면 몸이 좀 힘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적금을 까서 나눠가진  으로 제주도에 가기로 했다. 6월은 비수기라 티켓팅도 쉽고 숙소 예약도 매우 편했다. 김포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탔다.


  첫날은 비가 와서 칼 호텔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주변을 슬슬 걸었다. 날씨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힘들게 걸을 걸 그랬나. 그날 밤, 같은 숙소에 온 사람들과 저녁에 캠프 파이어가 있었다.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 술을 아주 빨리 마시던 남자가 있었다. 연극배우라는 그는 말끝마다 쌍욕을 달며 한 시간을 내리 혼자 이야기했다. 사장님이 중간에 화제를 몇번 돌렸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캠프파이어는 그냥 파이어 하는 게 나았다.

  다음날, 연극 배우는 안보였다. 사장님 말로는 새벽에 짐을 싸서 나갔다고 했다. 사장님은 연상의 아내와 서울에 살다가 아이가 생기지 않아 일을 정리하고 제주도에 왔는데 40살 된 아내가 임신했다며 나에게 좋은 기운을 전해준다고 했다.


  간단히 채비를 마치고 버스정류장에서 올레길 시작점으로 가는 버스를 다. 목적지에 내려 계속 계속 걷는다. 6월이지만 더웠다. 바람이 불어 땀이 식을 때는 시원했다. 올레길 위에 사람이 없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상관없다. 걸어야 잠이 오니까. 저녁에 숙소로 돌아왔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어제 봐둔 목욕탕에서 씻었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둘째 날 짐을 싸서 한라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다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인 길이 너무나 예뻐서 버스에서 내렸다. 사려니 숲 길이었다. 사려니 오름은 격년으로 등산로가 열린다고 하는데 운이 좋았다. 마침 가이드 투어가 진행되고 있어 뻔뻔하게 따라붙었다. 사려니 숲길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에 붉은오름으로 올라가는 표지판을 봤다. 이대로 내려가긴 아쉬웠다. 잠깐 다녀오자는 생각으로 혼자 붉은 오름 입구로 들어섰다.

  붉은오름은 등산로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습해서 나무에 이끼가 많이 꼈다. 좁은 꼭대기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이 안보였다. 등에 땀이 났다. 혼자 10분을 계속 돌다가 문득 올라오면서 뿌리가 뽑힌 채 90도로 누워있는 나무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났다. 그 나무를 찾아 오름을 내려왔다.


  그리고 큰길에 다와서 표지판을 보고 알았다. 여기가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였다는 것을... 몽고와의 전쟁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무신정권 실세의 사병들이 강화도와 진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와서 이런 곳에서 마지막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저항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근처에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놓였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관광차를 탔고, 나는 혼자 정류장에서 한라산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아침에 버스터미널 편의점에서 김밥과 생수를 샀었다. 한라산 입구에 왔을 때 이미 점심이 훌쩍 지난 뒤였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한라산 성판악코스에서 내려 산을 올랐다. 힘이 들었다. 오름이나 한라산 둘 중에 하나만 했어야 했나 싶었지만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오늘은 잠이 더 잘 오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 입산이라 한라산 끝가지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산 중턱의 사라오름 호수를 지나 사라오름 전망대까지만 갈 수 있었다.

  사라오름 호수에서 친구와 놀러 온 대학생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수영 금지라고 적힌 호숫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옷 벗고 수영하는 사람들도 봤다. 사라오름 전망대에서 김밥을 먹고 풍경을 보며 음악을 들었다. 사진을 많이 찍었다. 혼자 다닌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등산로를 따라 다시 내려와서 다시 버스를 탔다.


  주변이 어둑해질 즈음 제주도 여행의 두 번째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마당에 있고 화장실과 샤워실은 게스트하우스 안에 있다. 마당에 신발을 벗어 두고 들어가면 딱 앉은키만 한 높이의 방이 었다. 나름 안락했다. 숙소에서 오늘 밤 캠프파이어를 한다고 했다. 참가비 2만 원에 맥주 무한제공. 8시까지 테라스로 나오라고 사장님이 말했다. 8시가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마당으로 모이는 소리가 들리고 마당에 있는 내 방은 시끌시끌했다. 순간 마음이 동했지만 캠프파이어는 무슨...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정말 깊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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