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당분간 슬플 예정 23

우울증엔 갑오징어가 최고!

2021년 4월 21일


갑 오징어 회!

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다.

뭔가 얇은 비닐 같기도 하고, 불규칙적인 돌 같기도 하고,

오징어라는데, 회를 뜨니까 저렇게 생겼구나! 싶다.

갑자기 웬 오징어회냐고?

그것도 그냥 오징어가 아니고?(근데 그냥 오징어 회도 있나?)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도전해 보고 싶었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것,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것,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던 것, 한 번도 느껴보지 않았던 것들을 도전해 보고 싶었다.

평생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니체가 그랬다.

‘낯선 것에 대한 선의, 새로운 것에 대한 호의’를 가져야 한다고!

이를 테면,

늘 마시던 커피가 아니라, 처음 들어본 커피를 마시거나,

늘 듣던 김동률 음악을 벗어나, 잔나비의 ‘뜨여남볼’ 같은 음악을 도전해 보거나,

늘 가던 출근길이 아니라, 새로운 골목길을 통해 가 보거나,

늘 만나던 사람이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 인사해보기,

늘 타던 지하철이 아니라, 마을버스를 이용해 보기,

늘 읽던 류의 책이 아니라, 시집 같은 새로운 류의 글을 읽어보기

늘 보던 액션 영화를 벗어나, ‘모어 댄 블루’ 같은 알려지지 않은 멜로 영화를 보거나!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났을 때, 온 감각, 그러니까 오감이 살아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여행을 좋아한다고 한다.

코로나라서, 우울증 때문에 먼 길 갈 엄두도 나지 않아서, 내가 시도해 보는 작은 일상탈출은

‘갑오징어 회 먹기!’


일단 초장에 찍어먹으려는데, 그러면 맛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들어 알기에!

그냥 한 입 넣어본다.

미끄덩미끄덩,

뒤이어 오는 쫄깃쫄깃,

씹으면 씹을수록 느껴지는 고소함.

마지막 남은 잔해까지 목구멍을 넘어가고 나서야 맥주 한 모금 들이켜 본다.


'삶이란 별거 아니구나!' 싶다.

그렇게 우울해도, 그렇게 슬프고, 그렇게 힘들어도,

입안에 갑오징어 한 점 들어오니, 이렇게 맛을 음미하고, 느끼고, 기억하고!


오직 사람들만이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별하면 폭식을 하고,

상사에게 혼나면 쇼핑을 한다고 한다.

꽤 그럴싸하다.

폭식과 쇼핑이 좋은 것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다른 쪽에서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대신하여, 나름대로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건 놀라운 발견 아닌가?

특히 나처럼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벗어날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는 기본적으로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함이 지속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거기에만 함몰되어서, 결국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걸린 사람이라면

1.     지나가다 갑자기 한 번도 먹어본 경험이 없는 음식점에 들어가서 무작정 주문하기

2.     맨날 먹는 커피 말고, ‘아인슈페너’ 같은 왠지 고급스러운 이름의 커피 마셔보기(아픈 우리에게 그 정도 사치는 허락하자!)

3.     채워지지 않는 수동적 의존성에 기대이지 말고(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에서 수동적 의존성-남이 나의 행복을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은 헤로인보다 해롭다고 했다), 새로운 욕망을 찾아 떠날 것! (만화방에 가거나, 구두를 사거나, 멜로 영화를 보거나…)


우울증, 공황장애를 이겨보겠다고 참 별 짓 다 한다.

갑오징어 먹으면서 의미 부여하는 내 모습이 처량하면서도 대견하다.


그래도 의미를 찾았으니, 조금은 덜 슬플 예정


#우울증 #공황장애 #갑오징어


작가의 이전글 당분간 슬플 예정 2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