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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42

우연한 기회를 기다리다

2021년 6월 5일


생각해보면, 나의 우울증은 오래전에도 한 번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내 나이 39이던 시절이다.

나는 내 나이 40이 되면, 뭔가 엄청 잘 되어 있을 줄 알았다.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검은색 벤츠에, 비행기도 first class를 타고, 해외여행도 1년에 4번 정도는 나가는?

그런데, 막상 내 나이 39는 부모님 용돈을 30만원 주냐? 40만원 주냐? 이 쪽 저 쪽을 다 주면 외벌이인 우리는 힘들다 등등.. 왜 다른 형제들은 안 그러는데, 너는 셋째인데도 그렇게 잘하려고 하냐?(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공정성 이슈였다. 여하간 공정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힘들다!) 등등의 사소한 것으로 갈등이 생기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곳에 가면, 바라는 삶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허탈함이란…. 그냥 허탈함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 연이어 찾아오게 되면, 그때부터 우울감이 찾아오게 된다. 

우울감이 2~3주 지속되면 그게 우울증이라고 하던데…

내 나이 39살 7월부터 우울증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이건 뭐지?

난 뭐지?

난 왜 태어난 거지?

난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무작정 열심히 살면 안 되겠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내가 이렇게 무능력했나?

내가 이렇게 삶에 대해 순진하게 살았던 건가?

난 도대체 뭘까?

난 도대체 누구일까?


이런 고민들로, 역시 불면증에 시달렸었다.

생각이 많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

자려고 누우면 여지없이 찾아드는 ‘생각’들에 나를 내어주고, 밤새, 새벽 햇빛이 산을 늬엇늬엇 넘어올 때까지 꼼짝없이 두들겨 맞고 있어야 했다.

답이 없는 것이,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제일 무섭고, 막막하고, 두려웠다.

밥을 먹을 때도 난 도대체 뭘까?

문을 열 때도 난 도대체 뭘까?

세수를 할 때도 난 도대체 뭘까?

출근을 할 때도 난 도대체 뭘까?

치킨을 먹으면서도 난 도대체 뭘까?

존재가치를 알아내려는 나의 노력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계속되었다.

그런데, 존재가치가 그렇게 쉽게 찾아지나?

그냥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마치 북극 한파에 반팔 티셔츠 하나 입고, 온몸을 잔뜩 웅크린 채, 살을 에는, 정신을 에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당연히 잠을 못 자고, 답 없는 문제에 밤새 고민하니, 식욕도 떨어지고, 눈 밑엔 짙은 다크서클이, 살도 빠지고,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그런 날들이 지속되던 9월 말!

운전 중에 노원역 사거리 근처에서 우회전받으려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날씨가 덥지 않아서, 운전석 쪽과 조수석 쪽 창문을 다 내려놓고, 왼쪽 팔은 창틀에 걸터 놓은 채, 또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신호가 바뀌었고, 왼쪽 주시를 하며,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를 기계적으로 확인한 후에 큰 도로로 들어선 다음,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뒤 쪽에서 ‘웨앵’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백미러로 슬쩍 보니, 중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큰 사거리에서 곡예운전으로 우회전을 하다가, 미처 속도를 제시간에 줄이지 못하고, 거의 넘어질 듯하면서 내 차 뒤 쪽을 거의 받을 뻔하길래, 잽싸게 핸들을 오른쪽으로 더 틀어서, 왼쪽으로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대충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는 넘어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이제 내 갈 길 가면 된다’ 하면서 서서히 액셀을 밟는데,

아까 그 중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오토바이 소년이 내 차 옆으로 지나가면서, 내게 소리를 질렀다.

“씨발새끼!”

하며 휘익 도망가기 시작했다.


뭐?

뭔 새끼?

이 어린놈이..

내가 저 다칠까 봐 일부러 오른쪽으로 핸들까지 꺾어줬는데.. 뭐? 씨발새끼?


열심히 도망가는 그 녀석을 쫓아가서, 바로 뒤에서 엑셀을 더 밟아서 오토바이를 받아버리고, 그 오토바이는 3미터쯤 날아가, 아이가 먼저 떨어지고, 그 위로 오토바이가 떨어지는

상상을 하면서, 쫓아가다가….


갑자기

‘저 아이도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저 아이도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저 아이도 좋은 배움이 있었더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니, 그 소년은 쫓아가서 혼을 내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혼자 마음고생하며 견뎌온 것에 대해 가엽게 여겨야 할 대상이라 여겨졌다.

(진짜 ‘일체는 유심조’다)

그래서 힘을 주어 밟고 있던 엑셀에서 발을 떼었다.

부리나케 도망가는 그 소년을 보니, 그에게 ‘자기가 잘못했다’라는 반성이 있는 아직은 순수한, ‘쫓아올까’ 무서워함이 아직은 남은 그래도 아이 같은 모습이 보여 사뭇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반전은 그 다음에 있었다.


나는 계속 ‘나는 누굴까? 나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소년이 지나가면서, 답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씨발새끼!’

그랬다.

나는 ‘씨발새끼’였다.

와!

그렇게 고민 고민하고,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잠 못 들고 있었는데,

생전 누구인지도 모르는 소년이 스치듯 지나가면서 그 답을 찾아주었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나는 그 날 그 순간 이후로 회복이 되기 시작했다.

정답이냐 오답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오랜 고민에 대한 답이면 그 어떤 것으로든 충분했다.

내겐 후련함, 확인, 어떤 식으로든 해결!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

진짜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난 정말로 그 때부터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생각을 바꾸니 다르게 보이는 특별한 경험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우연하게 내게 다가오고, 우연한 사람에게 확인과 후련함을 받을 기회!

정답이든, 오답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아주 생각지도 못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그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오겠지?

머피의 법칙은 ‘안 좋은 일은 꼭 예상대로 일어난다!’가 아니라, ‘일어날 일은 꼭 일어나게 되어 있다’라고 한다.

내게 머피의 법칙이 작동하기를!

그 우연한 기회가 금방이라도 찾아와, 나를 공황장애에서 벗어나게 하기를! 나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그렇게 ‘당분간 슬플 예정’과 굿바이하기를!


그때까지 당분간 슬플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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