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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45

돈오점수

난 어렸을 때, 

순댓국을 먹지 못했다.

돼지창자로 만든 음식이라는 말에,,,,

창자라..

꼬불꼬불하고, , 미끄덩미끄덩하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상상되면서, 

‘어떻게 창자로 만든 음식을 먹지?’하며 속으로 구역질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엄청 잘 먹는다.

친구가 “점심으로 뭐 먹지?”하면,

“순댓국 어때?” 할 정도이다.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순댓국은 겨울에 먹으면 또 기가 막히다.

뜨끈한 국물에, 후추를 샤악 뿌리고, 싱싱한 부추를 잔뜩 넣고, 깍두기랑(순댓국엔 배추김치보다 깍두기다) 한 입 딱 먹으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구수함과 따스함!

왠지 세포들이

‘몸이 건강해지고 있어요!’하며 강강술래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정도이다.(오버가 심했나?)

어릴 때엔 구역질을 할 정도로 싫어했던 음식이 왜 지금은 이렇게 찾아 먹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된 걸까?(그러나 순대까지만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돼지 귀, 돼지 허파, 돼지 간, 돼지 위, 돼지 염통, 돼지 콩팥, 돼지 혀, 돼지 코, 머릿고기는 아직 못 먹겠다)

단순히 입맛이 변했다고 하기에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또 어떤 음식이 있을까?

과거에는 못 먹었는데, 지금은 곧잘 먹는 음식!

맞네!

회도 그렇네!

육회도 있고!

나물 종류도 그렇고!

청국장도 그렇고!


그리고, 대망의 ‘돼지 껍데기!’

어릴 적에 시골에 살았는데, 시골에서는 단백질 공급을 주로 개나 돼지로 했다. 가끔 죽은 소가 있어 먹었다가 죽다 살아난 어른들도 있다고 들었다. 어릴 적 기억이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우리 집 고양이가 죽어서 묻어줬는데, 아빠가 캐오라 그래서, ‘왜 그러지?’ 했는데, 저녁 식사로 고양이 탕이 나온 기억도 있다.(아주 어릴 적이어서, 감히 대들 생각을 못했는데, 70년대 후반 그 시절, 그 시골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흔한 일이라… 지금은? 거의 625 사변급이다. 절대 안 될 일이다.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특히 개를 잡는 것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고기를 부드럽게 해야 한다며, 살아있는 개를 감나무에 묶어놓고, 어른들이 마구 때리는 것을 보았고, 그다음, 지게에 머리만 나오게 하고 나서, 도끼로 한 번에… 그리고, 짚불에 털을 태우는데, 그 매캐한 냄새는 어린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단백질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아마 2차 세계대전의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가 그러지 않았을까? 아우슈비츠에 간 적이 있다. 죽은 유태인들의 머리칼을 남겨 놓은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는 오래된 단백질 머리칼 냄새! 삶과 죽음이 고스란히 남아서, 비명과 절규가 들리는 듯했던!

냄새는 이상하게 그 안에 숨겨진, 소리를 들리게 하고, 상황을 그리게 하고, 아픔을 느끼게 한다.

여하간, 다시 개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게 잡은 개를 어느 능숙한 어른이 칼을 들고 껍데기만 벗겨서 그걸 된장에 찍어서 야수처럼 먹는 모습을 본 이후로,, 껍데기는 내게 공포였고, 두려움이었으며, 비명이고, 절규였다.

그런 것을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목살을 먹으러 갔다가, 서비스라며 돼지 껍데기가 나왔다. 

생껍데기는 오~ 여전히 접근 불가능한, 젓가락이 절대 갈리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고개를 돌려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다. 

‘절대 먹지 않으리라! 아니 절대 먹지 못하리라!’

그런데….

한쪽면을 익힌 돼지 껍데기를 뒤집자, 잘 익은 부분이 꼬들꼬들한 것이, 누룽지 같기도 하고… 느끼하게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어? 뭐야? 나름 괜찮네?’하는 느낌?

양쪽이 잘 익었고, 

한 번 도전해 보라는 동료들의 말에,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돼지 껍데기를 용기 내어 집어 들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깨물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대로 꿀꺽하기로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짚불로 그을려진 개의 배 옆 부분을 도려내던 그 아저씨! 원시부족의 야만인처럼 피 뚝뚝 떨어지는 껍데기를 전리품처럼 자랑스레 여기던 그 희번덕거리던 눈!

‘부정적인 감정들이 더 치고 들어오기 전에, 이걸 처리해버리자!’라는 마음으로, 잘 구워진 노릇노릇한 새끼손가락 크기의 돼지 껍데기를, 재빠르게 입에 넣고, 계획한 대로 한 입만 딱 물었는데, 

“뭐여?”

이 꼬소한 맛은 뭐지?

이 꼬득꼬득한 아름다운 식감은 뭐지?

미끄덩미끄덩은 온 데 간 데 없고, 누룽지 같은 고소함, 흡사 쥐포 같은 끈질긴 꾸덕함!

한 번만 씹기로 했는데, 두 번, 세 번, 네 번,,,

음~

어느새 내 입에서는 감탄사가 연발하고 있었다.

너무 싫어했던 것이 ‘생각만큼 나쁜 것’이 아니라, 엄청 괜찮은…. 


희한한 반성이 몰려왔다.

내가 혹시 사람들을 대할 때 이렇게 대했던 것은 아닌지..

너무 싫어서 말도 걸지 않은, 무시해버리기 일쑤였던 그 사람!

혹시 지금 만나면 너무 괜찮은 사람인 건 아닐까?

그건, 그 사람이 좋게 변한 것이 아니다. 순댓국이, 돼지껍데기가 몇십 년, 몇 백년 늘 같은 모습이었던 것처럼, 그 사람은 늘 같은 모습이었고, 다만 내가 변한 것이었다.

그 사람은 같은 모습인데, 내가 부족하고, 내가 미천하여, 이제서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역시 내가 문제다.

나를 바꿔야 한다.

보다 성숙하고, 보다 지혜로우며, 보다 현명하게!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지금은 옳지 않다 해도, 언젠가 그 진면목이 나타나는 것을 기대하는, 옳다고 여겼던 것들에 확신을 갖지 않고, 틀리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 


그게 진짜 나이듦의 모습이고,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걸리기 전에는 늘 밖에서 원인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상황에서 원인을 찾거나, 남에게서 원인을 찾거나!

그런데, 요즘엔 늘 내게서 원인을 찾게 된다. 이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황이나 남에게서 원인을 찾게 되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좌절하게 된다.

그에 반해,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게 되면, 해결의 희망을 발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동력까지도 생기게 된다. 물론 힘들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보다 백 배 더 다행이지 않는가?

나는 지금 ‘내 안에서’ 원인을 찾고, 내 안에서 한 발 내 디디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걸로 ‘오늘 하루 충분히 잘 살았다’ 스스로에게 위안하련다. 


돼지껍데기가 또 여지없이 인생의 통찰을 가져다 준다.(우울증은 이래서 좋다)

그러니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로 고민하고 계시는 분이시라면,

어릴 적 혐오 음식에 도전해 보자!

1.     생각보다 괜찮을 것이고, 

2.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며, 

3.     그렇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머잖아 ‘당분간 슬플 예정’도 그 폭풍 같은 기세가 꺾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그 폭풍 같은 시기를 우리는 무사히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 선선한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날은 꼭 있을 것이다. 


돈오점수!

문득 깨닫고 점진적으로 수행한다!


오늘도 이렇게 고등학교 수업 때 배웠던 뭔 말인지도 몰랐던 것을 경험으로 배운다.


#우울증 #공황장애 #돼지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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