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백에서 배운 것
처음엔 놀랐다.
그리고 두렵기 시작하더니,
그 두려움은 장군처럼 막막함들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도대체 왜?라는 생각은 허무함도 일게 했고, 결국 무기력함과 패배감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결국 감정의 끝 외로움까지...
이런 감정들의 시작은 무엇일까?
시작도 궁금하지만, 끝은?
통제나 관리가 가능한 걸까?
이 감정들은 어디에서 바람처럼 살렁거리고 나타나서는, 폭풍처럼 휘젓는걸까?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휑하던가, 볕 좋은 봄날처럼 따사롭던가 하는 감정 이후의 배움은 왜 여태 오지 않는걸까?
비닐봉지에 있는 1,000장 정도의 종이를 에코백에 옮겨야 할 일이 생겼다.
오른손으로 잡으면 한 움큼만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해야 할 점이 순식간에 생각났다.
1, 오른손에 힘이 엄청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할 수는 있지만, 부담되는, 무거운?
2, 에코백 크기가 너무 딱 맞아서, 집어넣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내 스타일?
나는 힘들어도 한 번에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돈가스를 먹을 때엔 잘라가며 먹지 않고, 다 잘라놓고, 나이프 내려놓고 먹는다.
삼계탕도 뼈와 껍질을 다 분리해서 다른 그릇에 옮겨놓고, 순살과 국물만을 먹는다.
수박도 먹기 좋게 알맹이만 샥샥 잘라놓고 먹기 시작한다. 그래서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도 종영되고 나서 시즌 6까지 몰아서 한꺼번에 봤다.
그렇다.
나는 멀티가 되는 게 아닌, 단순함을 지향하는 사람인 것이었다.
그래서 한 번에 종이들을 옮기기로 하고, 비닐봉지에 있는 1,000 장의 종이를 움켜쥐었다. 묵직하다. 아마 쇠해진 몸 때문에 기력이 없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흐읍!
나지막이 기합 한 번 넣고, 왼손으로 비닐봉지 끝을 잡고, 오른손으로 종이를 끄집어냈다. 됐다.
이제 에코백에 한 큐에 넣기만 마면 된다.
비닐봉지를 잽싸게 내려놓고, 에코백을 잡고, 종이를 넣으려는데, 입구가 아슬아슬하다. 이쪽 끝, 저쪽 끝을 이리저리 넣으려는데, 엄지와 검지 사이가 아려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스타일 유지한다며, 포기할 수 없다며, 고집부리다가... 결국 털썩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라고?
나는 왜 무식하게 한 번에 넣으려 했던 걸까?
왜 그리도 낑낑대며 열을 내고 있었던 걸까?
허무함과 아둔함에 대한 반성에 잠깐 헛웃음이 났다.
마음 가다듬고, 눈짐작으로 5분의 1 정도 되는 200장 정도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가볍다. 좋다.
에코백에도 쉽게 들어간다.
다시 200장!
이렇게 쉬운 것을!
나눠서 하면 안 된다고 열 낼 일도 없는 것을...
200장!
200장!
마지막 200장을 넣고 나니 에코백이 가득 찼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 말 그대로 송곳조차 세울 틈이 없다.
이런 곳에 한 번에 넣으려 했다니...
쓴웃음이 번진다.
그래도 딱 맞으니까 좋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다.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아서 좋다.
이제야 본모습을 회복한 것 같아 참 좋다.
내가 나에 대해 이러고 있는 건 아닐까?
산적해 있는 이슈들을 너무 한 번에 해결하려 해서 힘들고, 지치고, 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도, 건강도, 관계도, 미래도 삼계탕 먹듯이 뭔가가 다 정리가 되어야 출발하려는 것이 아닐까?
나눠서 시작해야겠다.
하루하루를 건강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작은 것들로 큰 것을 이루어가야겠다.
그렇게 되면 딱 맞는 나, 딱 맞는 미래가 내게 '좋음'을 선물하겠지?
제 자리를 찾은 것 같겠지?
그제야 본모습을 회복하겠지?
살다 살다 비닐봉지의 종이 옮기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다니... 확실히 나는 예전의 나가 아닌 듯!
개똥철학이라도 그렇게 나만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세워야겠다.
그때까지는 또 계속 슬프겠지?
그래도 이겨내야겠지?
이겨낼 수 있겠지?
나는 이제 당당할 테니까!
나는 이제 외롭지 않으니까!
#우울증 # 공황장애 #대상포진 #에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