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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슬플 예정 57

당분간 안 우울할 예정

다시 읽어서 깜짝 놀라는 책들이 있다.

내겐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고, ‘폭풍의 언덕’이 그랬고, ‘주홍글씨’가 그랬고,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랬다.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으며, ‘맹목적인 사랑’과 ‘헌신하는 사랑’이 어떤 차이인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으며, ‘맹목적인 사랑’과 ‘영원한 사랑’은 같은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주홍글씨’를 다시 보며 ‘참아야 하는 사랑’과 ‘드러내야 하는 사랑’에 대해 아팠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으면서 ‘자유로운 삶’ ‘나다운 인간’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이 밖에 백경(모비딕, 여기에 일등 항해사 스타벅이 나온다. 그 스타벅! 우리는 일등항해사의 말을 들어야 한다. 흰 고래를 쫒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기여 잘 있거라, 목로주점, 슬픔이여 안녕, 변신 등등… 예전에 억지로 읽어서 줄거리만 알고 있었던 작품들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자의적으로 책을 집어 들고, 밤잠 설쳐가며 공감하고, ‘아! 이래서 그런 거구나!’ ‘아! 이건 지금의 나에게 이런 의미로 다가오는구나’를 연신 내뱉게 한다. 역시 고전문학은 자주, 여러 번 읽어야 맛이 난다. 

책장에 꽂힌 책에 시선이 멈췄다.

아! 맞다. 이 책이 있었지!

‘죽음의 수용소에서’

와! 내가 이 책을 잊고 있었다니.. 갑자기 미안해졌다.

이 책만큼 나를 깊이 끌고 들어간 책이 있었을까?

이 책만큼 내게 ‘인간의 고통’에 대해 샅샅이, 낱낱이 느끼게 해 준 책이 있었을까?

이 책만큼 내게 ‘행복한 줄 알아라!’라고 일갈했던 책이 있었을까?

그런 책을 잊고 있었다니…

주저 없이 꺼내 들었다. 

역시 술술 책장이 넘어간다.

경험을 토대로 한 책이라, 몰입되고, 이입되고, 공감되는데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나?

두둥…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나왔다.


‘죄수의 내면 생활이 보다 심화되어갈수록 과거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기도 했다!’

라는 부분에서 ‘아하!’하게 되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이후로 내가 왜 그렇게 산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산 오솔길 옆에 이름 없이 피어있는 꽃들의 아름다움에 왜 그리 눈물을 흘렸는지, 파란 하늘은 왜 그리 슬펐는지, 문득 고개 들어 보게 된 아카시아는 보기만 해도 어쩜 그리 향기로웠는지….

아픔으로, 괴로움으로 내면 생활이 보다 심화되어 가면 갈수록, 자연의 아름다움이 더 체험되었던 것이다. ‘삶과 자유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도 하지 못하게 할 만큼, 자연에서 극강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에 도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참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배고픔, 공포, 분노 등은 이상한 유머나 한 그루의 나무, 서쪽 노을에 빛나는 연보라색에서 핏빛으로 변하는 빛과 구름, 진흙바닥의 웅덩이에 비친 찬란한 햇빛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빅터 프랭클이 말했다. 내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상황에서도, 행복했던 기억,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희망만 있다면 존재는 결국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그렇게 자유를 얻어낼 것이라고 했다. 


나는 안다.

불면증이 우울증을,

우울증이 공황장애를,

공황장애가 대상포진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나의 불면증은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

물론 코로나가 방아쇠를 당기기는 했지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긴, 그게 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빼앗긴, 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빼앗긴, 삶의 철학, 신념, 가치, 무의식이 무너져 내렸던 때문임을 잘 안다.

이제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내게 말하는 듯하다.

“너의 모든 것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행복했던 기억, 앞으로 너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희망만 있다면 너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너라는 실존을 바로 확립하고, 오히려 더 건강하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라고!

갑자기 내가 가지고 있는 4관왕의 병들이 싹 다 낫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상쾌하고, 뭔가 묵직한 전율이 심장의 문을 열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너는 이제 다 나았다!’라는 나팔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냥 단순히 ‘괜찮다!’ ‘좋아지고 있다!’라는 느낌을 넘어선, 환희! 절정!

마침 창밖을 바라보는데,,,

서산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지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데, 죄수 한 명이 뛰어들어, 점호장 밖으로 나가서 해가 지는 멋진 광경을 보라고 했다’는 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되던 화찻간의 쇠창살 틈으로 바라본 석양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잘츠부르크 산의 상상봉이 저랬을까?

죄수의 내면 생활이 심화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광경인데… 저 무리 지는 햇빛, 그걸 떠 받드는 구름, 유유히 자기 갈 길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내면 생활이 심화되어 있는 나로서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빅터 프랭클도 저 해를 본 것일까? 저 노을을 본 것일까? 저 마음의 약을 본 것일까?

저 해를, 노을을, 마음의 약을 보며, 자신의 실존을 가다듬었던 것일까? 

저 위대함으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담담하게 이겨냈던 것일까? 


그렇게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하늘은 색이며, 모양이 짧은 순간에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아! 이건 

‘서쪽 노을에 빛나는 연보라색에서 핏빛으로 변하는 빛과 구름’


자유를 빼앗긴 자들에게,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저 색깔이, 저 빛이, 저 하늘이, 저 구름이, 저 자연이 알려주었을 것이다.

자연은 거의 90년이 지난 후에도, 서울의 어느 곳에 삶의 의미와 희망을 잃어버려 힘들어하던 내게 그렇게 힘내라고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울증과 불면증, 공황장애로 고생하고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면,

7월의 어느 날, 저녁 7시 즈음에 고개를 들어 지는 해를 바라볼 일이다.

해가 지고, 핏빛의 하늘을 오래도록 지키고 있을 일이다.

90년 전의 하늘이, 90년 전의 위로를 전할 것이다. 

‘너는 자유다!’

‘너는 실존한다!’

‘너에게서 절대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너의 삶을 계속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라고!


이제는 안 우울할 예정!

‘이제는?’ 

모르겠다.

확실히 당분간 안 우울할 예정!


#우울증 #불면증 #공황장애 #대상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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