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부엌에서 배운 삶의 본질
나는 오랜 시간 이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다. 카르마란 존재하는 것인가? 반복되는 삶의 패턴 속에서, 가족들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는 이유가 정말 업보 때문인지.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업보를 풀 수 있는지. 그리고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되묻곤 했다.
36살. 몸을 어느 정도 추스른 후, 내 삶의 답을 찾기 위해 종교에 기대어 보기로 했다.
공양주를 찾는 구인 글을 보며, 혹시 그곳에서 나를 추스르고 내게 맞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우리 집안은 모두 개신교를 믿는다. 나는 늘 가족과의 거리감이 종교와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궁금했었다.
어릴 적부터 산속의 조용한 절에서 기도하고 마음을 닦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만, 당시엔 가족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는 허락을 구할 나이도 아니기에, 공양주 생활을 시작하며 스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계산도 있었다.
공양주 생활은 괴롭거나 힘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어느덧 나도 스님이 되어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동시에 죽을 때까지 뭔가를 깨닫는 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깊어졌다. 그렇게 평온함 속에서도 원하는 마음이 생기니 번뇌도 따라왔다.
결과적으로 나는 진정으로 뭔가를 깨닫거나 포용하는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으나 지금은 당연한 결과라 생각하기 때문에 미련도 없다.
공양주 생활 중 고민 끝에 종교인의 길을 가자고 결심했으나 스님이 알려주셨던 절이 아닌 엉뚱한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정말로 종교인이 되기를 갈망했다면 어디에 갔더라도 절을 찾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생활비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고, 현지에서 일자리를 구해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종교인은 내 길이 아니었나 보다.’ 하고 쉽게 결론을 내리고 정착했다. 결국 그만큼의 결심이었던 거다.
공양주 생활은 길지도 않았고, 생각한 대로 끝맺음을 짓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게 삶의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을 체감시켜주었고,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다스려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마음속에서 반복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사고 이후 나는 많이 변했다. 온갖 비양심적인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전문직을 가진 이들에게서 대부분 부정적인 상황을 겪었고, 상당히 나약한 인간이 되어 갔다.
교통사고로 입원하게 된 나에게 그들은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CT 검사의 결과를 알려주지 않고, 병원에서 쫓아내기에 바쁜 모습을 보였다. 후에 병원 관계자와 손해사정인에게 듣고 어이가 없었다. 병원은 결국 대형 보험사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가끔은 병원이 약자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고. 그래서 대형 보험사가 얽힌 사고에서 보호자가 없거나 의사들을 무조건 신뢰하는 환자들에게 그런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 진단을 내릴 때는 100% 가해자의 잘못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던 의사가 마땅히 보호자가 없고, 보험사가 대형 버스 조합임을 알고 난 이후에 180도로 태도가 변한 경우도 있었다. 보험사와 면담을 한 후 진료를 받는 날 젊은 의사는 내가 원래 디스크가 있었는데 사고로 조금 더 심해진 정도라며 뻔뻔하게 진단서를 작성했다. 그들의 의무에서 정직과 신뢰는 없어져 버린 듯 보였다. 물론 초기의 진료 사진을 가지고 다른 병원에서 재판정을 받거나 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으나 그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지인도 그런 상황을 알려주기는 했으나 다른 도움은 줄 수 없는 듯했다. 내 보험을 관리하는 보험 대리인인 지인의 태도 또한 의사의 말에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잘라 말했기에 그들을 믿었었다.
머릿속 혈관이 터진 줄도 모르고 쫓겨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단 한번 딱 한 명의 의사만이 이런 상황을 가감 없이 설명하며 퇴원을 막아주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이후 변호사를 구했으나 기억의 혼란 속에서 2년 넘게 내게 고용된 변호사는 흔적도 비추지 않았다. 3개월 정도만 지나면 병원에서 쫓겨나는 상황 중에 한 손해사정인은 짐을 들어주는 일 정도는 도와줄 수 있다며 거절하는 나를 설득해 내 집에까지 따라와서 성 X행을 시도했다. 집요하게 시도하다 실패하고도 그는 뻔뻔한 얼굴로 태연하게 나갔다.
보호자가 없던 시기에 내가 병원에서 겪은 전문직 종사자, 그들의 태도는 대부분 비슷했다.
지인도 낯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태도를 혼자 오롯이 겪으면서 더 이상 세상은 교과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고는 나에게 누구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교통사고 자체보다 이런 이들에게 받은 2차적 상황들이 내 삶 속에 새로운 상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나의 질문에 매번 되살아나서 나를 해치는 힘은 수시로 자라고 있었다.
악의적인 경험들이 되살아날 때 내 속의 부정적인 부분을 넓혀갔다. 그리고 과거와 전혀 다른 냉소적인 ‘나‘가 되었다.
나는 뒤늦게나마 이런 나의 상태를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삶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자신을 인정하고, 믿으며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를 있는 그대로 아껴야 내면이 단단해진다.
내면이 중심을 바로잡은 후에야 인생도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오랜 시간 스스로 질문하며 얻은 가장 귀한 답이었다.
아픔, 절망, 분노로 덮였던 시간은 이미 지나고 없다.
그러나 그 경험들은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변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코 유쾌하지도 긍정적이지 않은, 고립의 삶을 택하게 된 원인이었다.
잠이 덜 깬 노아의 형제 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