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후 독립까지_ 진정한 홀로서기를 위한 시작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금전이 필요하다.
사고 후 보상금은 한 푼도 내 수중으로 들어오지 않았기에 나는 제대로 된 재활은커녕 큰 오빠네 집에 얹혀살며 일을 해야만 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얹혀살던 나의 상태는 그들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목발 없이 한쪽 다리의 힘만으로 그들의 공장에서 밤에는 일을 하고 낮에
는 소소하게 집안일을 거들며 근근이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버티며 일한 대가로 나의 허리는 망가져 버렸지만 그땐 아무것도 제대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멀쩡한 곳이 없었고, 터진 머릿속 혈관이 혈종 없이 아물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지금 생각하면 신의 축복이었으리라.
그나마 올케언니가 마비되거나 저린 증상을 알게 되면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며 주물러 주던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으나 그 정도의 관심도 평소엔 없던 일이었기에.
그런 상황에 아르바이트비로는 약값마저 충당할 수 없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급여 1종 생활 보호 대상자 신청을 결정했다.
대중교통으로 통원 치료를 받아보려 했으나 혼자서는 오가는데 이미 녹초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도움이 될만한 치료는 합의 후에는 보험 처리가 불가능했다. 결국 합의금을 직접 받지 못한 나는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빨리 독립과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지만 아득한 날들이었다.
육체의 고달픔보다 더 심란한 것은 그들의 무관과 큰 소리로 나누는 불편한 말과 행동들, 그리고 종교 생활의 강요였다.
오빠는 내 앞에서 들으라는 듯이 조카들에게 “우리는 4 식구다. 우리가 똘똘 뭉쳐서 한마음이 되어야 잘 살 수 있다.”며 수시로 말하곤 했다. 오빠에게 가족은 부부와 그들의 두 자식들만 포함된 숫자였다. 당연히 외식도 간식도 내 몫은 애초에 없었다. 비염으로 냄새를 거의 맡지 못하는 것이 그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나는 억지로 짊어지게 된 짐이자, 불편한 혹이나 마찬가지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내 선택은 아니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종교 생활에 무조건 동참하여야 했다.
그들에게 그들의 신은 숭배받아 마땅한 존재임이 분명했으나 내게는 강요당하는 종교에 호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독실하다 할 수는 없지만 나는 한 때 절에서 살고 싶었던 사람이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가진 것 하나 없이 그들의 편의대로 떠밀리던 내게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군것질에는 관심이 없어 밥이 식사이자, 곧 간식이던 내가 그때는 하루에 공깃밥 반 그릇 정도만 겨우 준비해 늘 혼자 식사했었다.
그때의 나는 식사든 잠이든 신경 쓰이지도 않았고, 배가 고프다는 감각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늘 바빴고 나는 타인보다 낯선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밤에는 그들의 공장에서 일하고, 낮에는 그들의 딸이 허물처럼 벗어 놓고 나간
이불이나 옷가지와 세탁물을 정리하며 지냈다. 그리고 일주일에 평균 3일은 교
회로 끌려다녔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그들과 다른 교회를 일요일만 다니겠다는 말에 “당장 나가라! 내 집에 얹혀살려면 우리 교회를 같이 다녀야 한다”는 확실한 대답이 돌아왔다.
-끌려다녔다는 표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에 떠밀려 벌어진 일이었기에
사용한 것일 뿐, 종교에 대한 다른 감정은 없음을 확실히 밝혀두고 싶다.-
나 또한 개신교에서 말하는 모태신앙인 사람이지만 내 의지는 0.1%도 없었다는 점에서 무의미하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에 종교는 수도 없이 많다.
모든 종교의 교리는 사랑과 배려이고, 어떤 종교를 택하든 개인의 자유이다.
그곳에서 너무 시달린 나머지 교회라면 고개부터 돌리게 되었다.
버티다 못해 그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혼자 걷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기어코 목발 의존을 벗어나게 되었다.
놀라는 올케언니를 보면서 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연기를 해 보였다.
우리를 둘러싸고 교회에서 성령으로 나았다는 올케와 기뻐하며 감사 기도를 외치는 다른 교인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나 또한 기뻐서 날뛰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드디어 그 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흥분을 티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즉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었지만 그곳은 사고 이후 처음 가진 소중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노아의 취미 생활_ 비닐봉지를 활용한 다리 싸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