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 만들기에 푹 빠져있었다. 본래의 나와 작가 자아를 분리하는데 도움이 될 거 같아서였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쪽이 더 자유롭고, 대담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평범한 내 모습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도 같았다. 의미 있게 혹은 아무 의미 없이 여러 이름을 짓다 보면 시간이 훅훅 가곤 해서 공부하기 전에 책상 정리 먼저 하듯이 나는 앉아서 필명 뭐할지부터 생각하는 거다.
유명 작가들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 지은 이름은 (예를 들어 ‘노해숙’ 은 노희경, 박해영, 김은숙에서 따 보았다.) 그분들을 닮게 해 달라는 내 염원과 더불어 연륜도 있어 보여 마음에 들었고, 성을 바꾸는 건 불효인가 싶어 부모님 성을 한자씩 넣고 지은 이름은 나 인 듯 나 같지만 나는 아닌 이름 같아 리스트에 올렸다.
조폭 같은 택배 이름 명단에서 발견한 ‘마춘동’과 ‘최두식’은 적당히 촌스럽고 듬직해 보였다. 물론 탈락한 이름도 있다. 이를테면 커피프린스 주인공 이름 ‘최한결’. 비난을 받을 때도 이 작가는 한결같다고 받을 거 같아 자체 탈락했다.
작명 어플에 사주팔자도 넣어보고 친구들과 회사 동료들에게서 이래저래 이름을 수집하다가 부모님께도 바꾸고 싶은 이름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빠는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대신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있었다. 할아버지 집에 있을 때면 종종 전화로 만식이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빠의 아명이었다. 최만식. 크면 만석꾼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었단다. 귀엽긴 했다. 그렇다면 엄마는?
“엄마는 이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있지.”
“뭘로 바꾸고 싶었는데?”
인자 씨가 개명하고 싶었던 이름이 있다면 그걸 받아 쓰고 싶었다.
“일인자.”
인자 씨는 꽤 진지했다.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 이인자 씨가 불리고픈 이름은 일인자라니!
이인자는 만날 2등만 하는 사람 같다고 일인자가 되고 싶었단다.
한동안 신나서 하던 필명 짓기는 이맘때쯤 멈추었다. 어느 이름을 갖다 붙여도 착 달라붙지 않는 것이 불리고픈 이름을 찾지 못한 탓도 있지만 인자 씨 덕에 뭘 떠올려도 자꾸 일인자를 떠올리게 되고 생각할수록 괜찮은 듯도 한 바로 그 점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먼저 내가 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한참 지나서도 일인자가 생각나길래 핸드폰에 이름을 일인자 씨로 저장해줄까 했더니 엄마는 이제 일인자가 싫다고 했다. 왜냐면 일인자는 내려올 일만 있다나. 그래서 인자 씨는 이인자로 살기로 했다는 후일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