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제작사의 피디로 일하는 은영이와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처음 만났던 열일곱, 교내 동아리 활동을 시작할 때 은영이는 방송반을 골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카메라 뒤에 서 있다. 낮이고 밤이고 주말까지. 일이 바쁜 은영이와 마음만 바쁜 내가 만나는 법은 수험생들이 독서실에서 만나는 법과 비슷하다. 시간은 없고, 할 일은 많을 때면 종종 조용한 카페에서 각자 노트북을 짊어지고 만난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별 대화 없이 마주 앉아서 은영은 봤던 장면을 보고 또 보는 일, 나는 쓰던 글을 쓰고 또다시 쓰는 일을 한다. 그럴 때면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어도 완전히 혼자는 아닌 기분이 든다.
여느 때와 같이 둘이 만나 각자 일하고 근처 밥 집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한 날. 돼지갈비를 시켜놓고 우왕좌왕하니 어느새 은영이 집게를 뺏어 들고 착착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잘 굽냐니까 다년간 회식으로 늘었단다. 일을 하다 하다 이제 고기 굽는 스킬도 늘려오다니. 새삼 한 가지 일을 한 회사에서 오래도록 하고 있는 은영이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하나 궁금해졌다.
“은영아 너는 어떻게 10년 가까이 질리지도 않고 그 일을 해? 도대체 뭐가 너를 일 하게 하는 건지 좀 말해 봐.” 내가 물었다.
은영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납품할 때 쾌감? 나도 잘 모르겠어. 옛날엔 스크롤에 이름 올라가는 게 좋았는데. 그때의 기분이 있거든.”
잠도 못 자는 날이 많고, 주말엔 친구 결혼식에도 못 가고, 심지어 한 달을 앓아누운 적도 있으면서. 그 한 달 쉴 때도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본인이 주목받는 일도 아니고 온전히 자신의 창작물도 아닌데 어쩜 그리 열심일까.
“네가 좋다는 그 기분이 뭘까. 이해가 잘 안돼. 마조히스트니? 고통을 즐겨?”
은영이 그랬다. “왜 너도 쓰잖아.”
아, 비슷한 걸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도 재밌어서 멈출 수 없고, 더럽게 하기 싫고 고통스러워도 막상 시작하면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내고 나면 뿌듯하고, 그럼 또다시 출발선에 선 듯한 기분.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아홉 시가 되기 전에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헤어지는 길. 알코올에 취약한 둘이라 술 한 병을 다 못 비웠지만 왜인지 기분은 더 좋았다. 맨날 바쁜 이 친구가 돈 때문이 아니라 재밌어서 일 한다기에.
재주가 많아 여러 우물을 파는 사람들도 대단하지만 다른 길은 상상해 본 적도 없이 오로지 한 우물만 파는 사람들의 단순하고도 묵직한 확신은 옆에 있는 사람까지 든든하게 만든다. 언젠가 은영이가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그만둔다면 내가 더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은영이의 꾸준함을 보며 안심하곤 하니까. 오랜 시간 지치지도 않고 열심인 건 노력보다 재능의 영역이 아닐까 싶지만 때로는 노력이 꾸준해서 재능이 되기도 하니까 나는 노력이라도 해 보고 싶어 진다. 옆에서 달리는 친구 덕에 나도 덩달아 달리고 또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 날이었다. 그냥, 재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