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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May 01. 2021

내 여자친구의 결혼

1.

리미는 내게 최초와 최고의 타이틀을 가진 친구다. 의외로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먼저 다가가 들이댄 최초의 여자이고 스물다섯에 만난 최고의 친구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녀가 왜 최고 중에 최(높을) 냐면 내 친구들 중 키가 제일 크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실은 그녀와는 말할 거리도 많지만 아무 말하지 않는 시간도 무척 좋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이해의 영역에 두지 않는다는 점도 좋다. 나와 그녀는 취향은 비슷하고 성격은 아주 달라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 친구 같은 모습이지만 어떨 때는 정말 언니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실제로 언니기도 하지만.

암담한 내수 패션에 열정과 청춘을 갈아 넣을 때, 나는 줄곧 도망치기 바빴지만 리미는 꿋꿋이 버티기도 잘했다. 일에서 도망친 내가 하릴없이 끼적댄 글을 읽고는 “네 글이 좋다”라고 말해 준 최초의 사람이고 “계속 써봐라”며 용기를 북돋아준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자존감과 자신감이라 부를 것도 없이 먼지처럼 부유했고 그대로 사라져 먼지가 되고 싶었다.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내가 그저 일기일 뿐이라고 해도 그녀는 같은 일기를 써도 자신은 그렇게 쓰지 못할 거라며 내 자신감을 채워주었고, 뜸할 때마다 요즘은 왜 안 올리냐며 재촉했다. 나 혼자 쓰고 보던 일기는 리미 덕분에 메모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별로인 내 모습도 괜찮다 하는 친구가 있어서 별로인 모습으로 별 볼 일 없는 나에 대해 썼다. 그러다 곧 별로인 모습도 받아들이게 되어 이대로 사라져 먼지가 되게 해 달라 염원하기를 멈추었고 다른 친구들에게, 나중에는 모두에게 보이게 된 것이다.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나를 더 크게 봐주는 사람이고, 나도 그녀가 그녀 생각보다 더 큰 사람이라 말해주고 싶다. (실제로 크기도 하지만)



20대 중반부터 끝도 없는 오르막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힘들수록 또렷하게 기억되는 그 시간들에 리미도 함께 있었다. 둘이 다니면서 “동성을 좋아하냐”는 오해도 간혹 받았는데 그것은 정말 오해다. 리미는 한동안 친구도 가족도 아닌 연인과 나눌 수 있는 감정들을 호소하며 소개팅에 열을 올리곤 했고 나는 남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므로 마음 나눌 일 없는 것들만 좋아했다. 진심으로 그녀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소개팅은 전투적으로 행해졌지만 백전백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소개팅 전장에서 무언가 깨달았는지 봤던 적도 다시 보고, 자아성찰의 시간을 거치기도 했다.

그날도 같이 저녁을 먹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 얘기가 불쑥 나왔다. 분명 다시 안 만날 거 같다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안 만날 거처럼 하더니 왜 또 만났어?” 내가 추궁하듯 물었다.

“으응... 그게 여러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서... 사람이 만날수록 괜찮기도 하고... 편하더라... 밥 먹은 게 다야. 아직 별생각 없어! 비밀로 해 줘.”



그녀는 말 끝을 흐리는 사람이 아닌데 그분에 대해 말 할 때면 자주 끝을 흐렸다. 그녀 스스로도 확신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말로 내뱉으면 확신이 되는 법이다.

마침내 그녀는 그 분과 저번 주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도 가족도 나눌 수 없는 감정을 나눌 사람을, 평생 함께 나눌 사람을 만난 것이다.



리미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FIK 친구들이 “그럼 아영이는 이제 어떡하냐”며 걱정했다고 한다. 최고 중의 최, 혜림이의 결혼으로 나도 이제 애인이 있어야 하는 건지 내심 초조해진 것은 맞지만 리미는 결혼을 해도 여전히 친구고 나도 이제 나이를 꽤 먹은 지라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전에도 꽤 많은 친구들을 보냈고 앞으로도 보낼 예정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매번 촌철살인의 직구 멘트만 날리는데 그래서 더 순수하게 느껴지는 칭찬과 진심이 있다. 결혼을 해서도 남편에게 그런 동반자가 될 거고 그런 리미와 함께 할 그분은 든든할 거다.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게도 사랑은, 화합은, 부딪히고 깨져도 해 볼 만한 것이라고 알려주기를.





2.

결혼식 축가를 남편과 둘이 씩씩하게 부르던 정미의 카톡 프로필 문구는 ‘정미는 햄 볶는 중’이었다. 정미 생일이라 선물 보내려다 봐버렸다. 햄 제대로 볶는가 보다 싶어서 별일 없냐 물었더니 행복하단다. 10년 연애하고 결혼하니 더 좋다고, 나보고 “아영아! 결혼 좋은 거 같아! 진짜 추천! 꼭 결혼ㄱㄱ!” 그랬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딸 텐데 정미야! 그렇게 보내려다 지우고는 얼마나 좋은지 만나서 들어보겠다고 보냈다. 굳이 햄 볶는 중인 친구에게 전할 거 까지야. 그리고 나는 햄을 좋아하지 않는다.





3.

작년 가을, 결혼을 준비하던 친구와 보러 갔던 용한 점집에서 내게 인연을 만나기 위해 알려준 비법이 있다. 분명 듣긴 들었는데 귓등으로 들었다. 그 점집에서 나는 “너 사랑이 뭔지 모르지?”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내 지난 사랑을 모두 우정으로 바꿔버린 잔인한 아저씨와의 만남 이후 6개월이 지났고 같이 갔던 친구도 결혼을 했다.



며칠 전에는 갱이도 상견례를 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17살에 만난 갱이는 시니컬한 소녀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미술을 한다고 전학까지 갔었던, 품은 열정과 추진력이 대단한 친구다. 우리는 계획도 없이 단양에 가서 패러글라이딩도 했고, 말자의 결혼을 앞두고 셋이 제주도 갔다가 죽을 뻔도 했고, 29살을 맞이해 눈 쌓인 한라산도 함께 올랐다. 웃기고 쿨하고 열정적인 갱이는 그 답게 프러포즈도 먼저 했다고 한다.



 “앞으로 그 사람이랑 살 생각하니까 뭔가 설렌다.”는 좀처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갱이를 보며 도대체 뭐가 설렌다는 건지, 얼마나 좋으면 같이 살 결심이 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말을 아꼈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일이란 내게는 엄청난 용기와 인내와 포기를 상기시킨다. 우리 언니랑 살아봐서 아는데 한 배에서 나와도 맞춰가기가 보통 일이 아니라고, 설렐 수가 없이 두려운 일이라고. 싸워도 헤어질 수 없고 그러다 아무 일도 없는 듯 다시 하하 웃곤 하는... 그런 일이다. 집에 오면 혼자가 아니라는 점은 싫을 때도 좋을 때도 있어서 나는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상상을 하면 침대는 따로 쓸지 아니면 엄청 큰 침대에 멀리 떨어져 누울지,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가질 순 없는지 그런 걱정만 하게 된다. 이런 내가 인연 비법을 이행하면 한 사람이 고통받는 것은 아닐는지.





4.

이사를 하고 한참 미뤄둔 책장 정리를 하던 중에 '결혼을 앞둔 커플을 위한 백문백답'을 발견했다. 몇 년 전 에세이를 입고 하러 다녀온 어느 독립서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도 없으면서 결혼을 걱정하고 백문백답부터 준비한 것이다.

서로의 결핍과 삶의 풍파를 함께  누군가가 그리울 때가 있다. 제도적 장치 아래에서 느끼는 안전이나 안정감이 아니라 함께하기에 삶이  이상 불안하지 않게 여겨지는, 그런 사람이 간절할 때가 있는 것이다. ' 사람이다'싶은 사람을 만날  있을까.  오늘만 말하는 내가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면, 혼자가 아닌 둘을 상상하게 되는 그런 날이 온다면 넌지시 백문백답을 건네게 될지도.

포장도 풀지 못한 백문백답은 가장 아끼는 책 사이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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