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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Oct 21. 2021

야광별


이직한 회사까지 그만두고는 조금 쉬었다. 매일 다짐하며 가야 했던 출근길, 해내야 한다는 압박과 기대 속에서 쉴 새 없이 다져지기만 했던 마음이 쉬어가야 할 때가 온 거 같아서.



그동안 고향 경주에 두 번 다녀왔다. 죽음과 죽음을 지키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같았던 경주는 변화했다. 변하지 않는 것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천년 넘게 잠든 고분 옆에 펼쳐지는 피크닉 돗자리 같은 것. 그런 게 공존하는 건 경주 밖에 없었다.



고향 집 내 방도 창고의 역할을 한지 오래됐다. 창문이 없어서 불을 끄면 완벽한 어둠이 되는 내 방. 수면등을 꼭 켜고 자는 내가 유일하게 불을 끄고 잘 수 있는 밤.

천장 가득 붙여놓은 야광별은 아직 빛을 잃지 않고 있었는데 그래서 좀 안심이었다. 낡은 방에 내가 붙인 별. 그리고 또 익숙한 듯 낯선 게 있다면 갈 때마다 조금씩 늙어있는 부모님이었다.



잠시 머물다 가는 내게 엄마는 뭘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온갖 것들을 쥐여준다. 옷만 잔뜩 넣어 간 캐리어에 엄마가 싸 준 짐이 한 짐이 돼서 돌아오곤 하는데 이번에 가져온 것 중 가장 사소한 것은 치약이었다. 백수니까 치약도 사서 쓰면 돈이라면서.



아침 7시 30분에 벌컥 방문을 열고 아직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엄마. 일어나란 소리도 없이 다짜고짜 말한다.


청계란 삶아놨으니 가져가.

무거워. 안 가져가.

아니. 가져가야 돼.


정말 저렇게 말했다. 아니! 가져가야 돼!

그 말을 끝으로 엄마는 일을 나갔고 백수인 나는 왜 인지 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잠이 들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지는 쪽은 늘 내 쪽이다.


그냥 계란이었으면 엄마도 안 줘. 근데 청계란은 서울에서도 쉽게 못 살 걸? 귀하니까 주는 거야.


오후에 돌아온 엄마는 협상 끝에 6개만 싸주기로 했고 ‘다 주면 좋겠구먼!’ 하면서 은근슬쩍 1개를 더 넣었다.

귀하니까 주고 싶은 마음. 나는 그것을 못 이기고 받을 수밖에 없다.


조금만 가져가는 대신 지금 많이 먹을게.

뽀얀 계란을 하나 툭 까서 먹어본다.

뭐야. 왜 맛있어? 고소해…

금방 한 개를 다 먹고 또 하나를 집어 드는 내 모습에 엄마는 의기양양해진다.

그렇지? 그렇다니까!



열차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엄마가 치료를 받으러 집을 나설 때 따라나섰다. 엄마는 만성 두드러기로 1년 넘게 피부과와 한의원을 전전하다가 민간요법까지 이르렀다. 내가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전에 얼른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지 확인시켜주곤 한다. 덜 아프면 그만 아닌가 싶어 나도 별 말은 하지 않는다. 엄마는 평생 어딘가 아프며 살았는데 이제는 젊은 시절처럼 금방 낫지도 않아서 잔병을 달고 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엄마가 씩씩하다는 것이다. 겁도 많고 엄살도 심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이를 꽉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이까짓 거! 못 이겨낼쏘냐! 하는 사람이 바로 이인자 여사였다.



갈래길에서 헤어지면서 나는 재취업에 성공하면 다시 내려오겠노라 했는데 엄마는 그런 나에게 재차 강조했다. 쉬면서 해, 쉬면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엄마 말을 들어서 안 좋은 일은 없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도 담고 엄마가 준 치약, 계란, 화장품 세트 등등도 담아서 길을 나섰다.

얼마 못 가서 걸음이 느려졌는데 고데기 선을 뽑았는지, 안 뽑았는지 불안해졌기 때문이었다. 시간도 한참 남았는데 돌아가서 확인해야 하나 싶었다가 대부분 이런 걱정은 걱정에 그쳤으므로 돌아가지 않았다.



출발 시간보다 한 시간 가량 일찍 도착한 역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데려다 주려는데 어디냐고 묻는 말에 나는 집에 고데기 선이 뽑혔는지 좀 확인해달라고 했다.


아빠는 아직도 나를 데려다준다. 10대에도, 20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중요한 날에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아빠랑 나랑 두 손을 꼭 붙잡고 기를 넘겨주는 의식이 있었다. 으으!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걸 못하고 왔다니 아쉬웠다. 이제는 내가 아빠에게 기를 넘겨줄 때가 되었음에도.



전화를 끊고 나니까 이제 정말 서울로 가는 기분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것과 끊임없이 변하는 것. 그 사이에 나도 있었다. 올 때마다 변하는 것이 풍경만이면 좋을 텐데. 딸내미 가방에 자꾸 이것저것 던져 넣는 엄마도, 어디든 데려다주는 아빠도 조금은 덜 늙고 그저 풍경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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