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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May 12. 2019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나는


내가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대학교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 집은 하우스푸어였다. 부모님이 평생을 모은 돈에 절반의 대출을 더해 산 건물은 우리 집이면서 우리 집이 아니었다. 건물을 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가 어려워졌다. 장사는 안되고 매일 이자만 쌓여갔다.

그 시절은 모두가 힘들었는지 몇 년 동안 값을 내려 집을 내놔도 팔리지 않았다. 번듯한 건물에서 장사도하고, 부족함 없이 먹고 자랐지만 부모님은 매달 돌아오는 이자에 허덕였다.

우리는 건물 1층에서 3번의 장사를 말아먹고, 2층에서 울고 웃고 기대하고 단념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며 살았다. 자그마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랬다.



고등학생 ,  연예인이 사업실패로 자살을 했다. TV에서는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며 매일같이  사건을 떠들어  연예인의 남은 가족들은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내몰렸다. 그는 어쩌자고 혼자 떠난 것인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야자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아빠는 그 뉴스를 불 꺼진 가게에서 보고 있었다.


“저 사람, 왜 죽었는지 아빠는 알겠어.”

아빠가 까만 눈을 하고서 말했다.


“왜 그래. 무서워, 죽지 마” 나는 아빠를 끌어안았다.


엄마는 온 점집을 돌아다니며 점을 봤다. 온갖 신을 다 믿었다. 부처도 장군도 성경도 우리 집엔 다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버텨야 했던 날들이었다.

눈 감으면 돌아오는 매일을 걱정하면서도 엄마와 아빠는 꿋꿋이 그 시절을 버텨냈다. 한없이 약하고, 그보다 더 강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근처 대학에 1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경영학과에 입학해 부채도 곧 자산이라는 공식을 배웠고, 그 공식에 따라 남들 다 받는 국가장학금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4년을 보냈다. 주말엔 늘 알바를 했고, 1년에 한 학기 정도는 장학금을 받았다. 부족한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대신했다. 시험 기간 동안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면 매번 아빠가 데리러 왔는데, 아주 늦은 새벽에도 아빠는 왔다. 24시간 할매 국밥집에서 마주 앉아 국밥 한 그릇 들이키고 고된 하루를 털어버리면, 그게 우리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었던 집은 내가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었을 때에야 팔렸다.



엄마는 아주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라고 했다. 빛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을 아주 오랜 시간 지나왔다고.

지금 집엔 찬장에 넣어두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그릇들이 많다. 언니 시집갈 때 주려고 산거라며 넣어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엄마는 빚이 없어진 그 날 이후 엄청나게 많은 그릇들을 사모았다. 아무도 엄마를 말리지 못했다. 좋은 그릇, 좋은 냄비 하나 제대로 못써봤다는 엄마. 그게 엄마의 지난 시절과 고생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마음 조금이나마 채워진다면 그걸로 됐거니 했을 뿐이다.

그러고 또 몇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디쯤인가. 우리는 벗어나고 있다. 우리를 마음까지 가난하게 만들었던 그 시절로부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얼마 전 엄마는 환갑을 지났다. 요즘은 집 근처에 작은 가게를 얻어 준비 중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될 공간. 전화를 하니 오늘은 7시가 훌쩍 넘은 시간까지 가게를 단장하다 집에 들어왔다고 했다. 오픈은 언제냐 물으니 보름 뒤로 정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서두를 게 뭐 있나 싶어서 천천히 하기로 했다며. 그러면서 내게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불편하고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이 따라올 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한 달 전 흘리듯 했던 투정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때 나는 회사 일이 힘들어서 예민함을 주체할 수 없다고 했었다. 멀리서 걱정했을 엄마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사랑한다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빠는 농민사관학교에 다니며 SNS 과정을 듣고 있다. 여러 SNS 중 아빠가 제일 열심히 하는 건 블로그인데 매일 지치지 않고 포스팅을 한 개씩 하고 있다. 카카오톡으로 공유해주는 것도 꼬박꼬박.

블로그 소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초보 농부의 좌충우돌 일기장’. 저번 달엔 블로그 순위가 70만 등까지 올랐다가 광고성 포스팅으로 게시가 정지됐다며 전화가 왔다. 밤마다 공들여 쓴 수십 개의 게시물을 놔두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지만 아빠는 좌절하지 않았다. ‘광고라니! 물 한 모금 못 얻어먹었는데 우째 이런 일이!’ 했을 뿐이다. 아빠와 퇴근길에 전화하면서 6월에 놀러 갈게 했더니 아빠는 그러지 말고 블로그로 놀러 오라고 했다. 그러고선 본인도 웃긴지 흐흐흥하고 웃는 바람에 나도 따라 웃었다.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부모님과 그 절반도 채 못 살아 본 딸이 나란히 걷는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못 할 일도, 모두 물거품이 됐다고 해서 좌절할 일도 아니라고 먼저 가서 얘기해준다. 지나온 당신의 삶을 빌어 얘기해준다.

인생은 왜 이리 더딘가 싶어도 조금씩 흘러가고 있는 거란다. 언젠가 그랬었지 하며 웃어넘길 날도 온단다. 그러니 좋은 생각만 하며 살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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