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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Jun 23. 2019

계속 써 보겠습니다

1.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다. 내 삶을 넘어서 타인의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이제는 더 많은 인물을 끌어들여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내 안을 들여다보며 쌓아온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어 진 것이다.


지난겨울, 문득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생각에  무작정 드라마 교육원에 지원했다. 돈만 내면 되는 줄 알았더니 면접도 보고, 혹독한 면접관을 만나면 울면서 나오는 사람도 더러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잔뜩 긴장했었다. 겨우 다섯 줄 쓰는 자기소개도 이틀을 고민해서 쓸 만큼.


우려와는 달리 면접장에서 나를 맞아준 면접관은 무척 상냥한 분이셨는데 여러 드라마를 쓴 베테랑 작가이기도 했다.


작가님은 내 이력서를 보다가 조카들과 이번 겨울에 경주 여행을 가기로 했다며 경주 사람은 경주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경주에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언제나 경주를 좋아한다고 했다. 내 대답에 이어 드라마 작가가 어릴 때부터 꿈이었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아뇨, 어릴 때 꿈은 다른 거였어요.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는데 끝엔 늘 다른 걸 선택했었어요. 나는 재능이 특출 나지 않으니까 이걸로 밥 먹고 살긴 어려울 거야, 이 길보다는 저 길이 넓으니까 하면서요.”


작가님은 내 대답을 듣고 이력서를 한 번 더 훑더니 왜 하고 싶은지 적혀있으니 다른 걸 물어야겠다며 회사를 다니면서 할 생각이냐고 했다. 나는 또 아니라고 했다.


“당장은 한곳에 집중해보고 싶어서요. 인생에 한 번은 최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다시 회사를 다니게 되더라도 꾸준히 해보고 싶어요.”


미소를 띤 채 바라보는 작가님 눈빛이 ‘계속해도 돼.’ 하는 듯해서 천천히 하고 싶은 말을 꼭꼭 씹어 말했다.


“무언가 되지 않아도, 아무것도 안 돼도 그냥 한 번 해 보고 싶어요. 그래도 언젠가 되면 좋겠지만.”


그 말을 하면서 왜인지 조금 울컥하고 말았다.


“좋은 마음이에요. 열심히 해봐요 우리.”


꾸벅 인사를 하고 면접장을 나와 실없이 웃었다. 무언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2.

그렇게 앞뒤 재지 않고 던진 선택으로 수업이 있는 화요일마다 즐거웠다. 드라마는 이런 거야 하며 하나, 하나 배울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구성만 배우고 바로 백지 앞에 세워졌다. 난생처음 시놉시스를 쓰고, 한 편의 대본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하루 종일 앉아서 한 줄도 못 쓰는 날도 있었고, 겨우 머리를 쥐어짜며 써놓은 걸 지우고 다시 쓰는 날도 있었다. 쓸쓸하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보다 즐거움이 몇 배로 더 커서 계속 쓸 수 있었다. 계속 쓰고 싶어졌다. 


나는 전에 써놓았던 짧은 글을 토대로 단막극을 썼다. 주인공은 딸과 엄마다.

극에서 딸은 안전한 울타리를 넘어 꿈을 좇는 소녀이고, 엄마는 그런 딸을 불안해하며 갈등을 빚는다. 딸이 자신의 꿈을 좇는 동안 엄마는 불안정한 꿈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딸은 엄마의 응원을 받지 못한 채 꿈을 향해 나아간다. 불명확하고, 불투명하고, 험난함이 예상되는 길. 딸의 고민과 주저함은 끝에 가서야 엄마에게 닿는다.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 망설이는 순간, 엄마는 돌아서 딸의 등을 밀어주는 그런 내용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되었을까? 그건 가장 쉽게 내 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기 때문이었다. 내게 큰 언니 같은 존재인 정민이 언니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런 말을 했었다.


"난 아직도 적응이 안 돼."


결혼하고 4년이 지났는데도 적응이 필요하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했다.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삶은 매일 적응 중이라고.

아내이자 엄마이고 또 자신이어야 하는 삶은 어떤 걸까 궁금했다. 우리 엄마도 그랬을까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부모가 돼 본 적 없으니 부모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우리 엄마, 인자 씨를 토대로 캐릭터를 만들었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면서 하루하루 그 역할을 잘 해내야 했을 아내, 엄마 그리고 인자 씨. 내 자식은 좀 덜 힘들고, 덜 아파하기를 바랐을 인자 씨, 결국은 자식이 행복하면 그만인 인자 씨.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을 우리 인자 씨를 생각했다. 엄마 딸로서의 나는 내 마음밖에 몰랐지만 작가로서의 나는 엄마의 마음까지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대본을 쓰면서 딸이 되기도 엄마가 되기도 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슬퍼하고, 이해하고, 끝내 화해하는 주인공들과 함께 나도 조금 성장한 기분이었다.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중력, 그제야 엄마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모진 말을 하고 돌아서 눈물짓는 사람들의 따뜻한 성장 이야기로 그려보고 싶었는데 아직은 어설프기만 하다. 그래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른 형태로 쓸 수 있어 행복했다.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속 써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언젠가 우리 인자 씨에게도 이 이야기를 보여주는 날이 오면 좋을 것 같았다.





3.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써야 된다 생각할수록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더 잘하고 싶어서, 자꾸 욕심이 나서 두려워졌다. 내가 쓰는 게 하나도 성에 차지 않아서 쓰고 싶을 때까지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고 아무것도 쓰지 않았더니 안 쓰고 있다는 생각에 더 괴로워졌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가. 차라리 뭐라도 쓰고 괴로운 편이 낫겠다 싶었다. 뭐든 쓰면 일단 안 써서 받는 스트레스는 없을 테니까.


일요일마다 함께 스터디를 하는 경은이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작가 교수님께 글이 쓰기 싫을 때는 어떻게 하시냐고 물었더니 뭐라 하셨게요?”


“뭐라 했는데?”


 “그냥 한다.”


아무것도 안 돼도 괜찮다며 시작했던 처음을 떠 올렸다.

왜 쓰기 시작해서, 무엇을 위해 쓰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모두 ‘그냥’이었다.

그냥 좋아서. 되던 말던 그냥 하는 거였다.



지난겨울 첫 수업 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들었었는데 적어두길 잘했다. 마지막 말이 요즘 내게 꼭 필요한 말 같다. 어떤 도전이나 시작을 앞둔 친구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천천히 해도 돼. 자신감을 가져. 스스로에게 상처 주지 마. 개판으로 깨져도 괜찮아. 쫄지 마.’


앞으로는 더 깨질 일만 남았다. 그래도 그냥 하는 게 좋겠다. 생각만으로 가슴 벅차 하던 때를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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