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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Sep 07. 2019

뒤로 걷는 계절

계절의 끝자락에서 계절이 아쉽다. 뭐랄까, 얼른 지나가라 재촉할 땐 언제고 이제 돌아서는 옷자락을 붙잡으며 조금만 있다 가면 안될까 하는 모양새다. 있을 때 잘할 걸. 아니, 더 즐길 걸 그랬다. 이 여름과 더위를.


나는 유독 여름을 나는 게 힘들다. 더위도 잘 안 타고, 땀도 많이 안나는 편인데 후덥지근한 공기가 괴로워 숨을 잘 못 쉬겠다. 목욕탕 사우나에서도 1분을 못 견디는 탓에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가을로 뛰쳐나가고 싶어 진다. 갈 수 있다면 말이다.


오랜만에 퇴근 후 친구를 만난 날이었다. 서로 회사의 중간인 양재에서 만나 밥을 먹고, 조금만 걸으면 조용한 카페가 있다기에 친구가 안내하는 데로 가기로 했다. 저녁인데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아서 나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선뜻 따라나선 것을 후회했다.



"얼마나 더 가면 돼?"


"왔던 만큼만 더 가면 돼."



알고 보니 양재천 숲길 끝자락에 있는 카페로 가는 중이었다. 카페에 도착하기도 전에 집에 가는 것을 걱정하며 걷다 보니 눈 앞에 숲이 보였다.

'그래, 이거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면 그런 기분이었을까.


숲길로 들어서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연 바람, 흙, 빌딩 숲 아니고 진짜 숲. 그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길 옆으론 빗물에 불어난 강이 흐르고, 해는 져가고. 문득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예리야, 나 여름이 너무 덥고 지겨운데 갑자기 너무 아쉬워."


"너 나이 드나 봐."



정말 그런가?

나이 든다는 거, 같은 계절인 듯해도 정말 같은 계절은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인 건가.

여름의 얼굴이 있다면 스무 살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럼 매번 낯선 얼굴을 하고 있던 건 계절이 아니라 나였던 걸까?


스물아홉의 여름. 그저 기쁘게 서른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못내 아쉽다.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돌아오지 못할 걸 알아서. 계절과 함께 내 스물도 지나는 듯하다.


참 무더웠었지.

이십 대는 줄곧 여름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뜨거워서, 불안해서 숨이 턱턱 막혔다.

지나와보니 그만큼 위태로이 반짝이던 날들도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만큼 반짝이진 못할 것 같다.


정말 나이가 드나 보다.

계절과 시간과 시절과 사람이 지나간다. 나는 그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마음은 아직 몸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벌써 그리워서, 조금 더 머물고 싶어서 자꾸만 뒤로 걷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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