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학원을 같이 다녔던 친구들을 만났던 날이었다. 정재 오빠는 회사를 그만 두기 전이었는데, 회사를 다니며 요가 수업을 듣고 있다고 했다.
업무 스트레스도 요가를 시작하며 이겨낼 수 있었다고, 지금은 지도사 자격증을 하나 땄다고 했다. 훗날 회사를 그만두면 요가 강사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바잉 MD에서 요가 강사라니, 놀랄 법도 했는데 그게 정재라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잘 어울렸다. 그는 늘 자신만의 시간과 속도가 분명해서 옆에 있는 사람까지 덩달아 마음을 놓게 만들었다. 큰일이 나도 큰일이 아닌 듯 넘겨버릴 수 있는 초연함, 나는 그의 그런 태도를 좋아했다. 휴가에 인도의 명상센터에 간다며 훌쩍 떠나던 걸 봐왔기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넌 어떻게 지내?"
같은 질문이 혜림 언니에게 돌아갔을 때
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하고 싶은 게 없어. 그냥 일만 해. 하고 싶은 게 있는 애들이 너무 신기해."
그 말에 오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일을 할 때 인가 보지."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언니와 나는 순간 벙찌고 말았다.
혜림 언니에게는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이 처음이었고, 나는 언니에게 한 번도 그렇게 말해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동안의 내가 무안해질 만큼 간결한 한마디였다.
나는 혜림 언니에게서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하고 싶은 게 없냐고, 작은 거부터 뭐든지 해보라고 등 떠밀기만 했었다. 하고 싶은 게 없을 수도 있지 했다가, 아무래도 일 중독인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는데 내가 누굴 위로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내 무기력함을 버티려 갖은 애를 다 쓰던 때여서 다른 이의 무기력함을 가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를 다그치듯 그녀를 억지로 일으키고, 다그치곤 했었다.
그저 일을 할 때 인가 보지 같은 한마디면 충분했을 텐데. 그럴 때도 있는 거라고.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도 잘 헤아리게 될까. 단단히 붙잡아 줄 수도 있을까.
나에게도, 남에게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앞에 닥친 문제들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걱정하며 골똘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임을 잊지 않고 싶다.
말이 그 말의 주인을 닮는다면 느려도 확실한 언어로 말하고 싶다.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그런 사람, 위로될 수 있을까. 나보다 더 나를 믿는 사람들에게.
받은 마음만 차고 넘치는 것 같아 더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