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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24. 2020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아한다는 것

아무튼 외국어, 문구, 여름

'아무튼'이라는 말에는 힘이 있다. 앞에 나온 어떤 얘기에도 굴하지 않는 결론이 나오기 전 튀어나오는 의미심장한 단어기 때문이다. '아묻따' 라는 유행어를 낳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라는 모 상조회사 광고 단어가 떠오른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 투성이인 세상 살이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팍팍한 삶의 윤활제가 되어준다. 때로는 저자들의 업이기도 하고 그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한 애정의 대상들을 따라가보았다.

 '아무튼 외국어'는 작가의 외국어에 대한 애정과 열망이 담긴 책이다. 이런저런 언어 공부에 발을 담가본 후기도 솔직하게 실려있는데, '기초 한 권으로 끝내기'를 채 떼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접한 외국어인 영어부터, 새내기 때 멋모르고 수강했다가 꼴찌를 면치 못한 스페인어, 취업 준비를 하며 울며불며 한자를 외웠던 중국어까지.. 새로운 언어에 발을 담그며 한국어와 다른 부분, 그리고 언어에 배어있는 그들의 문화에 놀라지만 그 이상 깊이 공부해본 적은 없는 나의 '언어 기미 상궁' 같은 부분이 조금 덜 부끄러워졌다.


연중 돈을 벌고 연휴에 돈을 쓰며 명절 피란을 단행하는 등 틈틈이 이국으로의 도피를 모색하다 연휴가 끝날 무렵 냉큼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하며 근속 일수를 늘려가고 있다. 귀국행 비행기에서 '이 나라말을 배워서 다시 오자' 다짐하면서.


<아무튼, 문구>는  대표적인 덕업 일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릴 때부터 문구용품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는 그 관심을 꾸준히 이어나가, 자신을 '문구인'으로 칭하며 배민문방구에서 직장생활을 한다. 최근 '규림 문방구'라는 귀여운 전시를 열기도 했다.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문구용품들의 숨은 매력을 찾고, 의미부여하는 작가의 세심함이 배달의 민족 재직 시절 마케터로서 성실하게 근무하게 해준 주요 자질이 아닐까 싶다. 아래 인용구는 표지를 보고 '책을 쓸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겨우 문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자못 진지하게 하는 구절이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의 힘을 믿는다. 생필품들은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쓸모없는 물건들이다.
'규림문방구' 전시 @영등포 롯데백화점




<아무튼, 여름>은 여름에 대한 나의 기억을 조작해놓은 책이 되었다. 한국의 무더위는 이름값하는 습도로 사람의 진을 쏙 빼놓는 계절에 불과했는데, 작가의 여름 사랑은 이 뜨거운 날씨를 (올해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마저도 못 누렸다) 조금 더 즐기게 해준다. 더울 때 마시는 맥주 한 잔, 여름날의 연애, 물놀이의 즐거움 등 피하지 못할 계절이라면 그 계절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즐겨야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준 책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좋아하는 즐거움은 일상의 무한동력이 된다. 어떤 것을 '아무튼' 좋아하느라 한층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뜩 읽고 나니 나 또한 덩달아 고무된다. 덕질 대상을 찾아 여력을 마구 쏟아줘야할 것만 같다. 그것은 소모가 아니라 또다른 충전일 것이다. 이런 덕질의 선순환을 가장 잘 표현한 말로,  마지막에 소개한 <아무튼 여름>의 한 구절로 마무리한다.


좋아하는 게 하나 생기면 세계는 그 하나보다 더 넓어진다. 그저 덜 휘청거리며 살면 다행이라고 위로하면서 지내다 불현듯 어떤 것에 마음이 가면, 그때부터 일상에 밀도가 생긴다. 남작했던 하루가 포동포동 말랑말랑 입체감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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