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시드니의 옆자리

눈부시게 비어 있는 장소 ㅣ 추억의 파편

by 윤희오 hio



그곳은 추억이라 부를 만한 조각이 남아있지 않은, 그저 눈부시게 비어 있는 장소에 가깝다.

24년 전 9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혼인선언을 하고 도착한 시드니의 첫 햇살은 눈부셨다. 오페라 하우스의 하얀 지붕은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조각보 같았고, 달링 하버를 스치는 바람은 이곳을 찾은 외지인에게 설렘을 주기에 충분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먼저 잡고, 앞서 걷는 그의 팔을 당겨 팔짱을 끼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의 팔에 매달리듯 고개를 기댔다.


“오빠, 저기 좀 봐.”


시원한 바다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빌딩 숲을 품어 안은 바다의 개방감 앞에, 긴장했던 가슴이 단숨에 트였다. 설레는 시간으로 가득할 것 같다는 예감에 나는 기분 좋게 들떴다.
넓게 펼쳐진 거리 옆으로 높은 빌딩이 줄지어 서 있고, 햇살 아래 제각각의 선명한 채도를 뽐내는 노천카페의 캔버스 어닝들이 거리를 따라 리듬감 있게 늘어서 이국의 색채를 완성하고 있었다.

멀리서 냇 킹 콜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잭 니콜슨과 헬렌 헌트가 마주 앉아 서툴지만 진실한 마음을 나누던 식탁 위에 흐르던 노래였다.

그와 함께 커피의 그윽한 향을 맡으며 음악 소리를 들으며 바람을 느끼며 영화 속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우리 저기서 커피 한 잔 하고 가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내 얼굴 대신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내가 가리키는 카페 쪽을 한 번 보는 의식적인 동작 위로 그가 입을 열었다.


“커피 마시고 싶어? 숙소에도 있어.”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섞여있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가 보자”
“내일 투어 일찍 시작하니까 가서 쉬어야지.”


그의 세계에서 ‘커피’는 ‘마시는 행위’ 일뿐이었다. ‘내일의 일정’은 사수해야 할 질서였다. 나를 느끼지 않고 피사체처럼 보고 있던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껏해야 가 보고 싶은 저곳에서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 말 뿐이었을 게 뻔했다.


‘다른 의도는 없으니까. 쉬고 싶은가 보다’ 나는 그렇게 첫 번째 서운함을 설렘의 이면에 슬쩍 구겨 넣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시드니의 따뜻한 공기가 내 옷자락 안에서 나도 모르게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블루마운틴으로 향하는 투어 밴 앞. 세 커플이 함께 이동을 하는 일정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 알았다. 그도 나도 일주일 휴가를 만들기 위해 미리 처리해 둘 일이 많았다.


낯선 타지에서 모든 결정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 그때의 내게는 가장 편안한 순응이었다. 밴의 문이 열리자 다른 부부들은 재빨리 뒷좌석을 차지했다. 남자는 잠시 자리를 살피더니 나를 배려하는 듯한 표정과 미안함이 함께 묻어 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내가 앞에 앉을게.”


그는 덤덤하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덜컥. 문이 닫히는 소리는 나와 그 사이를 가로막는 벽의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텅 빈 뒷좌석 중앙에 홀로 앉아 룸미러를 응시했다. 거울에 걸린 그의 뒤통수는 미동도 없었다.


옆자리 커플의 작은 속삭임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밴 안을 메웠다. 그들의 숨소리가 섞여 뜨겁게 달아오를수록, 내 옆자리는 서늘하게 비어 있었다. 나는 그 빈 공간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이 남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궤도대로 돌고 있는 걸까. 나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따지기엔 내가 너무 구차해 보였다.


호텔 방에 돌아와 짐을 풀면서도 나는 먼저 침대에 몸을 던진 그를 깨우지 않았다. 베란다에 서서 반대로 떠 있는 시드니 하늘의 달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호흡이 갑자기 너무 멀게 느껴졌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성실하고 점잖은 사람인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끈거리게 했다. 악의가 없기에 저항할 수 없고, 의도가 없기에 탓할 수도 없는 것의 정체였다.


나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내 숨을 그의 박자에 억지로 맞춰보기 시작했다.



글. 사진 ㅣ 윤희오(hio) 사진설명ㅣ 시드니 풍경을 유리 위에 드로잉 기법으로 표현한 글라스 페인팅 개인 작품.




'곁에 있어도 외롭다'는 말처럼 당신은 언제 가장 외롭다는 감정을 느끼나요?

다음 화, [제4장 : 파란 지붕의 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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