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일관성이라는 저주

편안히 내쉬고 있는가? ㅣ '점잖고 성실한' 일관성

by 윤희오 hio



사무실 주차장에 도착할 즈음, 스피커를 통해 경쾌한 드럼 비트와 함께 데이브 브루벡의 ‘Take Five’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 리듬 그대로 성큼 사무실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소란이 나를 반겼다. 쉴 새 없는 타격음과 매캐한 토너 향이 섞인 이 공기는 내게 악보 없는 ‘잼 세션’이었다. 누군가의 질문에 다른 이의 대답이 즉흥적인 화음을 얹는 순발력 있는 리듬. 서로의 박자를 감각적으로 알아채는 이 속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쉬었다. 나를 살게 하는 휴식이었다.
오후 무렵, 수리가 끝난 차를 찾아 돌아오는 길. 사고의 흔적을 지워냈다는 해방감을 안고 곧장 단골 바 ‘무제’로 향했다.


“그래도 차는 빨리 나왔네.”
“나도 빨리 퇴근해서 나왔어.”


대학 동기 수연이 먼저 와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제의 사고부터 식탁 위에서의 그 서늘했던 대화까지 쏟아냈다. 수연은 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다 말고 내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보다 건조했다.


“글쎄... 네 남편은 그래도 점잖잖아. 밖으로 돌거나 사고 치는 놈들에 비하면 양반이지. 차라리 그게 나아.”


그놈의 '점잖다'는 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점잖음이 실은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수연에게 설명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수연은 안주로 나온 오징어를 씹으며 뜬금없이 물었다.


“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이 괜히 있겠어? 쓸데없는 말 많이 하는 것보다 입 닫고 있는 게 백배 낫지. 무던하게 있는 사람이 살기엔 더 좋지 않아? 요즘 세상에 그만한 신랑감 없다더라. 근데, 사랑은 많이 해주지?”


‘사랑.’ 그 말랑하고 가슴 저릿했던 말이 묵직하게 내 가슴 한복판을 툭 건드렸다. 나는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는 것으로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기어이 한 단어가 ‘사랑’을 밀어내고 있었다.



Coherent.


양가 어른들의 주선으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반듯한 태도가 그저 어른스러워 보였다. 결혼을 코앞에 둔 어느 날, 남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치 학생에게 질문을 하는 선생님처럼 말했었다.


“영어 단어 coherent 뜻 알지? 일관성이라는 거잖아.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일관되게 할 자신은 있어. 변하지 않을 거야.”


그때 그는 미동도 없이 내 눈을 응시했다. 겸연쩍어했지만 식탁 위에서 ‘접대 중이었다’는 사실만 입력하고 싶었던 그 눈빛이 이때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처럼 들렸었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 프러포즈를 자신에게 하는 맹세로 대체되었던 순간이었다.

나는 그 말을 사랑의 맹세처럼 들었다. 하지만 어제의 사고 이후, 그 단어는 내 머릿속에서 전혀 다른 질감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떠한 외부의 충격에도, 내 눈물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제 궤도만을 고집하겠다는 선언이었을까. 그 ‘일관성’만을 잘 지킬 것 같아 소스라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일관성’이라는 단어가 가진 서늘함을 의심했다.


그때, 낮게 깔리던 트럼펫 소리가 멈추고 거친 워킹 베이스(Walking Bass)가 바 ‘무제’의 정적을 툭툭치고 올라왔다.


“어이, 윤 기자! 여기서 청승 떨고 있냐?”


선배 성준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앉기도 전에 맥주 한 잔을 주문한 그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너 어제 사고 났다며? 남편도 많이 놀랐겠다?”
“오빠는 그냥 ‘잘 처리했냐’고 묻는 게 다였대요.


내 답을 대신 전하는 수연의 목소리에 성준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잔을 탁 내려놓았다.
“야, 마누라가 길바닥에서 떨고 있는데 점잖게 ‘처리 잘했니’가 뭐야? 나 같으면 당장 달려가서 상대 놈 멱살이라도 잡았겠다.”


성준은 짐짓 흥분한 듯 보였지만, 곧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남자의 책임감'이라는 논리로 남편을 두둔하기 시작했다.
“근데 윤 기자, 너희 남편만큼 성실한 사람도 드물다. 사고 안 치고, 꼬박꼬박 월급 가져오고. 남자들 세계에서 그 정도면 상위 1%야. 좀 무미건조해도 그게 남자 인생의 무게라고 생각해 줘라. 책임감 있는 놈들이 원래 좀 딱딱해.”


나는 반쯤 남아있던 맥주를 한 번에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잔을 내려놓았다. 뱃속까지 찬 기운이 내려갔다. 남편의 일관성은 분명 든든하고 견고한 울타리였다. 하지만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 울타리 안에서,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허기 같은 것을 느꼈다.


분명 '점잖고 성실한' 남편인데, 왜 나는 그가 약속했던 그 '일관성'이라는 단어를 자꾸만 입안에서 굴려보게 되는 걸까.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것을 바꾸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었다. 글. 사진 ㅣ 윤희오(hio)





당신의 '사랑'은 어떤 단어로 밀려난 적이 있나요?

다음 화, [제3장 : 시드니의 옆자리]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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