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흙의 시간

『숨의 방향』ㅣ 24년의 침묵

by 윤희오 hio


파란 지붕 아래, 차가 멈췄다.


12월의 텅 빈 논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트렁크가 열리고 뒤따라 내린 남자는 집에서 가져온 김치통을 꺼냈다. 남자가 양손에 김치통을 들고 나무 대문을 넘을 때 나도 발을 옮겨 파란 지붕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을 오고 간 것도 벌써 24년째였다.

드르륵, 현관을 지나 낡은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어머니, 김치 가져왔어요."


집안은 어둡고 공기는 눅눅했다. 그 너머에서 어머니의 초점 없는 눈빛이 '김치'라는 단어에만 아주 짧게 머물렀다. 남자의 어머니는 내가 밀고 들어온 문을 지나쳐, 발끝에 겨우 걸린 슬리퍼를 끌며 대문을 향해 나갔다.

나는 이 장면을 이미 알고 있었다.


슥, 슥, 슥—.


마른 바닥을 훑는 슬리퍼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남자는 말없이 어머니의 뒤를 따랐고, 나 역시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발을 되돌렸다.

배추밭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 눌어붙은 겉잎 사이로 발을 디딜 때마다 흙이 메마른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다. 어머니는 그 텅 빈 밭에 쪼그려 앉아,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흙 묻은 손가락이 메마른 땅을 파헤칠 때마다 손톱 밑으로 검은흙이 비집고 들어갔다.


나는 그 손을 막아서는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말릴수록 흙에 집착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겪었다. 어머니는 오직 '애비'라 부르는 아들만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밭둑 끝에 서서 어머니를 보는 대신 멀리 산 능선만을 응시했다.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그의 손끝이 씰룩거리는 것이 외투 너머로도 느껴졌다.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멈추게 하지도 못한 채, 그는 울음인지 숨인지 모를 무언가를 목구멍 뒤로 삼키며 꼿꼿이 서 있었다.


어느 전쟁터 사진에서 보았던 천 야드 시선(Thousand-Yard Stare)이 떠올랐다.

눈앞의 참혹을 지워내기 위해 아득히 먼 지평선으로 초점을 옮겨버린 군인의 눈동자처럼, 지금 먼 산의 능선을 훑는 그의 눈도 꼭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과 살갑게 마음을 나눌 틈조차 없었던 고된 시간을 걸어왔다. 그녀의 지극한 인내 뒤에 숨겨진 설움을, 아들은 그저 묵묵히 곁을 지키는 침묵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굳게 다문 입술만큼이나 견고하게 굳은 그의 등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으로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두 사람의 건조한 숨소리만이 밀폐된 공간을 가득 메웠다.


3시간 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비로소 멈춰있던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발뒤꿈치가 바닥을 지날 때마다 둔탁한 쾅쾅 소리가 바닥을 눌렀다. 그렇게 그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부엌과 거실을 오가다가, 커피 한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창밖의 비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고, 텔레비전 속 앵커의 목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무의미하게 채웠다.


'최근 급증하는 황혼 이혼— 이혼 연령의 평균이 이제는 50대를 넘어섰습니다.'


내 시선이 화면에 멎었다.

내년이면 53세, 누군가에게는 정리를 시작할 나이였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찾을 나이였다. 앵커의 입술은 계속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뉴스 자막 위로, 오래전 수첩 속에 박제해 두었던 그 인터뷰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24년 전, 결혼한 해부터 조금씩 쌓여 무거워진 정체 모를 그것들은 내뱉지 못한 숨들의 첫 기록이다.



글 l 윤희오(hio)




당신의 숨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다음 화, [제1장 : 보호자]로 찾아뵙겠습니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