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배트맨은 경계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는 시계추처럼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는 정의로운 자경단이다가도 분노 가득히 주먹질을 하는 두려운 누군가가 된다. 배트맨은 서로 다른 욕망 사이에 서 있고, 서로 다른 진실의 경계선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살짝만 삐끗해도 그는 전혀 다른 누군가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히어로를 보여주며 그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한 끗 차이지만 너무나도 다른 욕망이 배트맨을 위태롭게 한다. 밤거리를 활보하는 그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건 정의를 수호하겠다는 욕망이다. 선한 듯 보이지만 그 욕망은 손쉽게 경계를 넘어 다른 차원으로 향한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는 때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복수다.” 브루스 웨인의 부모님은 강도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알려졌다. 어린 시절 브루스 웨인은 그 장면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분노와 복수심을 품고 성장했다. 영화 초반에 배트맨이 길거리의 범죄자를 주먹으로 때리다 그의 화가 여실히 표출되는 지점이 있다. 악을 폭력으로 응징하여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해소하겠다는 욕망은 정의 구현이라는 선한 욕망을 호시탐탐 노린다. 그 경계를 넘는 건 한 순간이다. 배트맨은 자신의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인지하고 있다. 리들러 역시 그 점을 간파하고 배트맨의 지금 위치를 짚어낸다. 리들러는 이런 수수께끼를 낸다. 잔인하고 허상과도 같으면서 맹목적이기도 한 것. 폭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 바로 정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행하는 정의는 폭력의 잔인함과 한 끗 차이를 가진다. 배트맨은 공포를 통해 정의, 즉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그런 정의는 잔인하고 맹목적이기도 하며 종종 배트맨 자신이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혼란에 빠지게 한다. 정의 구현과 복수를 외치며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는 리들러는 더욱 그를 고뇌에 차게 한다.
**'아버지의 죄'를 이야기하는 부분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순된 욕망 때문에 진실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그래서 배트맨은 정의를 지키는 자경단인가 아니면 복수심에 불타는 별종인가? 그는 리들러한테서, 캣우먼한테서, 그리고 리들러의 추종자들한테서 자신을 비춰본다. 그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때면 배트맨은 두려움 섞인 눈빛을 보인다. 복수심으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은 얇디얇은 경계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분노 가득한 욕망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두 가지 모순된 진실을 모두 가져야 한다. 영화는 이렇게 갈라진 진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지를 찾는다. 배트맨의 욕망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리들러는 ‘아버지의 죄’를 이야기하며 그 대가를 브루스 웨인이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배트맨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다. 그에게 부모님은 선량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웨인 가문의 어두운 과거가 드러난다. 브루스 웨인의 할머니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남편을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하고 만다. 그 충격으로 브루스 웨인의 어머니가 정신병원을 다녀야 했는데, 선거를 앞두고 한 기자가 이 모든 사실을 알아냈다. 그의 입을 막고자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가 팔코네를 시켜 기자를 죽이도록 했다는 게 리들러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브루스 웨인은 팔코네를 찾아간다. 팔코네는 토마스 웨인(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이 기자를 살해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뒷골목 범죄자를 찾아와 그렇게 부탁한 건 곧 죽이라는 말과 똑같지 않느냐고 말한다. 충격을 받은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가문에서 오래도록 일한 집사 알프레드를 찾아간다. 토마스 웨인이 기자를 죽이라고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고, 실제로 죽일 마음이 없었다고 알프레드는 말한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는 기자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죄책감에 자수를 하러 갔지만 그 길에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한 건 자신의 아내였다고 그는 덧붙인다. 배트맨과 관객의 입장에서는 둘 중 어느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팔코네의 입장에서 자신이 말한 건 진실이고 알프레드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말한 건 진실이다. 또 하나, 아버지의 욕망이 모순되는 아들의 욕망을 만들었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미세한 부분에서 양 갈래로 갈라진 진실. 여기에 탐정인 브루스 웨인을 투입한 건 어딘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영화는 브루스 웨인이 자신의 부모님에게 얽힌 어두운 진실을 찾아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 동시에 배트맨의 진정한 근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탐구하기도 한다. 탐정은 사실, 즉 있는 그대로의 일을 밝혀 내기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진실을 선택하고 사건을 종결한다. 물론 상반된 둘의 말을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기도 하다. 아버지가 기자를 살해하고자 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끔찍한 이가 아니었으면 하는 욕망에 따라 알프레드의 말을 곧장 수용한다. 사실이 무엇일지는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명석하게 추리해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배트맨조차도 부모님의 과거 앞에서는 한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리들러 역시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실을 선택한다. 그의 무력감과 분노를 해소할 수단으로써 하나의 진실을 선택했을 뿐이고 복수를 선택했을 뿐이다. 이 영화의 암울한 지점은 여기 있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고 각자의 진실만이 존재한다.
확실히 어두운 톤이다. 배트맨은 결국 폭력으로 점철된 욕망을 버리고 진정한 영웅이 되지만 이 영화 속에 어둠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추천하는가? 추천한다. (사실 어둡기 때문에 내 취향이다.) <더 배트맨>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와 비교하는 관객이 많다. 물론 <다크 나이트>는 대단한 작품이 맞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대다수의 관객이 그 영화를 관람한 후 사랑에 빠진 건 조커였지 배트맨이 아니었다. 배트맨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지만 조커만 기억에 남아 우리의 주인공에게 미안할 정도다. 그런 점에서 <더 배트맨>은 배트맨을 위한 영화다. 서로 다른 욕망과 진실 사이에서 배트맨은 분노에 찬 주먹질을 하다가도 두려움 섞인 눈빛을 보이기도 한다. 살짝 구부정한 어깨를 가지고 피곤한 얼굴을 한 브루스 웨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혼돈에 위축된 것처럼 보인다. 시장의 장례식장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를 바라볼 때 그는 안타까움과 동질감이 뒤섞인 얼굴을 한다. 짙게 뒤틀린 배트맨의 내면을 더 자세히 포착할수록,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히어로의 고뇌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이제 배트맨과 사랑에 빠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