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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이 May 13. 2023

스무 살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오래된 테잎 속의 너

현아,

이렇게 네 이름을 불러본 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너는 잘, 지내고 있을까.

너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나를 너는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꽤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얼마 전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네가 나에게 선물로 주었던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어. 네가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로만 녹음해서 주었던 테이프.

그 속엔 20여 년 전 너의 앳된 목소리도 녹음이 되어있겠지.


‘생일 축하해… 생일 선물로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이 테이프를 만들게 됐어.’

그러고 나서 네가 헛기침을 했던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가.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어서 확인해 볼 수는 없었지만 너의 목소리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어.


종로 서울극장 옆 카페에서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나의 대학동기였던 J와 너의 대학동기였던 K는 서로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그 두 사람을 통해 우리의 만남은 이뤄졌었지. 핸드폰이 없던 시절 너는 우리 집에 전화를 해서 첫 만남의 약속을 잡았어. 너는 파란색이 섞인 점퍼를 입을 거라며 그날 네가 입을 옷에 대해 설명해 주었지. 어찌나 친절하고 자세한 묘사였던지 눈에 그려질 정도였어.


(C)unplash


시간이 흘러 약속 당일이 되었고,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어. 별다른 인테리어랄 것도 없이 테이블만 줄지어 늘어선 모습은 카페보다는 고속도로 휴게소를 연상시키는 풍경이었지.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지만 너로 짐작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빈테이블로 가서 카페 출입문을 마주 보고 앉았어.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10분쯤 늦게 왔어야 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애가 내 앞에 와서 서는 거야.

“너 김영이 맞지? 나야, 오늘 너랑 만나기로 한 사람.”


나는 고개를 들어 너를 쳐다봤어.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처진 눈매와 달리 살짝 올라간 입꼬리, 귀를 덮을 정도로 단발에 가까운 커트머리. 170이 조금 넘을 듯한 왜소하지도 우람하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 네 말대로 파란색이 섞인 털 점퍼를 입고 있는 너에게선 소년미가 남아있었지. 뭐랄까… 다람쥐, 그래 다람쥐 같았어.


너는 나보다 훨씬 전에 도착해 내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고, 망설이다 내게 말을 걸었다고 했었지. 그때 우리가 마주 앉아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우리의 연결고리였던 J와 K에 대한 이야기로 어색함을 풀려고 했을까. 대화의 끝에 네가 ‘영화 볼래?’ 물었고, 나는 ‘그래’라고 대답했지. 그런데 토요일 저녁이라서 예매가능한 표는 2시간 후에나 있었어. 너는 ‘어떻게 할까?’ 다시 물었고, 나는 ‘예매하자’고 말했지. 2시간이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았었나 봐. 우리는 그렇게 남는 2시간 동안 서울극장이 있던 돈의동에서 탑골공원이 있던 낙원동까지 종로 거리를 누비며 함께 걸었어. 한 시간쯤 걸었을까. 걷는 게 조금 지칠 때쯤 피카디리 극장자리에 있던 2층 카페 창가자리에 나란히 앉아 또 차를 마셨지. 네가 내 옆모습을 흘끔거리는 걸 알았지만 나는 짐짓 모른척했고, 나 역시 곁눈으로 네 옆모습을 훔쳐보았어.


그런데 그날 우리가 무슨 영화를 보았더라. 우습게도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영화 보기 전후의 기억은 생생해. 영화를 보고 나올 때쯤 예보에도 없던 비가 와서 네가 우산을 사 왔던 것까지도.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커플이 되었어. 스무 살 첫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던 거야. 후훗.

현아, 그거 알아? 너랑 하는 모든 것이 내게는 처음이었다는 것.


우리 집 근처 공원에서 네가 동네 친구와 함께 해주었던 불꽃놀이.

홍대 근처 포장마차에서 너의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우동.

서로의 집 근처에 연락도 없이 방문해 서로를 깜짝 놀라게 해 주었던 것.

장미보다 안개꽃이 좋다는 날 위해 안개꽃 한 다발을 선물로 주었던 너.


(C)unplash


그리고 너와 함께했던 스무 살 화이트 크리스마스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한강 유람선을 타기로 약속했고, 그날 너는 엄마차를 끌고 나를 만나러 왔지. 나는 너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갈색 체크무늬 스커트에 브라운 코트로 멋을 부렸고, 너는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나타났어. 그런 네 모습이 제법 근사하게 보였던 것 같아. 차 안 라디오에선 God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우리는 조금 들떠 있었어. 그런데 한강유람선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지. 겨울바람이 어찌나 매섭던지 멋을 부리느라 얇게 입은 옷 속으로 추위가 파고들었고, 한강의 밤풍경을 즐길 여유는커녕 빨리 내렸으면 싶었으니까. 배가 정차하고 조금은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고수부지를 따라 올라오는데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어.

“눈 온다.”

우리는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었어. 네가 나의 손을 잡았지. 네 손이 얼마나 따뜻하던지. 네 손을 잡고 눈 오는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기분이었어.


다음 해에 네가 군대에 가면서 우리는 결국 헤어졌지만… 나는 가끔 그날을 떠올리곤 했어.

순수했던 그 시절의 너와 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삭막해진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으니까. 그 이후로 몇 번의 연애를 더 했지만 너는 여전히 나에게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사람이었어.


현아, 너에게 이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것 같아.

나의 많은 처음을 너와 함께 해서 참 좋았다는 말.

아마, 이 편지는 결코 너에게 부치지 못하겠지만.

더는 재생할 수 없는 카세트테이프처럼.


너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이 참 그립다.

안녕, 나의 첫사랑.

고마웠어.



+ 너와의 지난 시간이 윤색되었다면

그건 아마도 이 노래 때문일지도.

https://youtu.be/AHJGY_xHk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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