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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이 May 20. 2023

카레와 항상성

요리는 즐겁다. 손으로 뚝딱뚝딱 뭔가를 만드는 일의 기쁨이 있다.


야채의 껍질을 벗기고 흐르는 물에 씻어 도마 위에서 송송송 썰어나가는 맛.

거기에 보글보글 달그락달그락 찌개 끓는 소리와 달군 팬 위에서 노릇노릇 고기볶는 냄새까지 더해지면

오감이 열리고 설렘이 살아난다.


날것의 재료들이 서로 섞이고 균형을 이뤄 적당한 맛을 내기 시작하면 느껴지는 희열과 성취감. 요리솜씨라야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를 따라 하는 수준으로 대단치는 않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신선한 재료로 간만 잘 맞춰도 나름 그럴싸한 맛이 난다는 걸 알 정도는 되었달까. 요리를 완성하고 나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다.


물론 자주 하지는 못 한다. 하루에 한끼정도. 어떨 때는 몇 주에 한두 번 정도에 불과할 때도 있다. 하고 싶을 때만 할 수 있어서 더 좋은지도. 아마 삼시세끼를 해먹어야 한다면 이 놈의 세끼(욕 아니에요ㅎ)라는 말이 절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오랜만에 요리를 했다. 더워진 날씨와 하는 것 없이 분주한 마음탓에 인스턴트나 패스트푸드로 대충 끼니를 때운 지 몇 주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끼니는 굶지 않고 잘 챙겼는데 건강하지 못한 음식에 위장이 아우성을 쳤다. 탈이 난 것이다. 죽으로 살살 달래보려는데 사 먹는 죽에서는 인스턴트의 맛이 났다. 집밥이 그리웠다. 제대로 차린 밥 한끼가 먹고 싶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 장바구니를 챙겨 근처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 가서야 메뉴를 정했다. 야채가격이 몇 달 전에 비해 3분의 1정도로 저렴해서 싱싱한 제철 채소를 넣어 카레를 만들기로 했다. 묵직한 장바구니만큼 장을 보고 돌아오는 마음이 든든했다.






예전에 살던 오피스텔은 1층에 편의점이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 가듯 나는 그 편의점을 자주 들락거렸다. 내 또래 여성이 사장이었고, 낮에는 그의 어머니가 가게를 봤다. 넉살 좋은 어머님은 갈 때마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날은 삼각김밥에 컵라면을 계산하는데 그녀가 바코드를 찍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식탁 위를 풍성하게 잘 꾸려야 돼요.’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웃으며 ‘네~’ 하고 답했다. 그녀의 말은 따뜻함이 담긴 걱정이며 조언이었다.


언제나 혼자 사는 일의 중요한 화두는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하루의 루틴을 지키고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품을 들여야 했다. 조금만 소홀해도 일상은 흐뜨러지기 쉬웠다. 먹는 일도 그랬다.


나는 카레를 만들며 항상성을 생각했다.


어린시절, 엄마가 해주던 카레는 삼일을 내리 먹어도 될 정도로 양이 많았다. 흡사 비상식량 같았다. 그 덕에 엄마는 가족의 끼니 걱정을 다소 덜 수 있었다. 만들기도 쉽고 영양소도 풍부한데다 한번에 많은 양을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음식이었을까.


나는 엄마의 마음으로 나를 위한 카레를 만들며 일상을 잘 유지하기 위한 대비를 한다. 균형을 지키는 일은 늘 어렵지만 그게 살아가는 맛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나의 저녁 식탁은 풍성하다.

맛있는 한끼에 살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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