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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Nov 18. 2022

로렌스 애니웨이 비평문1_이름 지키기의 여정

이름 지키기의 여정

아말





   ‘로렌스 애니웨이’가 여타 퀴어 영화들과 다른 점을 꼽자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이름을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스스로에 대해 뚜렷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고, 원하는 것도 확실하다. 욕구의 궁극적인 방향성이 정해지지는 않을지언정 불투명한 적은 없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 망설임이 없다. 이들은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고,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당장의 서로를 향해 달린다. 그래서 영화는 인물이 자신을 찾으며 방황하는 부분을 점프컷으로 뛰어넘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신이 될 것인가의 문제 뿐이다. 따라서 이들의 여정은 이름을 찾는 것이 아닌, 이름을 지키는 여정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주인공 로렌스는 자신이 여성임을 이야기한다. 서른 다섯 해를 남성으로 살아온 그는 생일을 기점으로 커밍아웃을 하고, 옷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영화에서 ‘옷’은 자기 표출의 수단이다.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던 로렌스는 다양한 색을 띈 여성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을 내보이고 동시에 시선의 대상이 된다. 카메라는 로렌스를 바라보는 얼굴들을 타이트 쇼트로 잡아 화면 한 가득 담는다. 그 속에는 경멸이나 조롱, 애써 가장하는 무시도 존재한다. 이 표정들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처음 치마를 입고 직장에 출근한 로렌스는 그런 시선들을 느끼며 어딘가 들뜬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로렌스는 트렌스젠더로서, 사회에서 ‘일반’ 혹은 ‘정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로 인해 그가 감내해야 했을 것은 존재의 부재였을 것이다. 진정한 그의 모습은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지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진짜 나’의 모습이 가시화되는 순간은 로렌스에게 있어 희열과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그것은 처음 느끼는 존재의 순간이다.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는 익명에서 특정한 개인, ‘로렌스’로 세상에 나아가 서는 순간이다.


   그러나 보아진다는 것이 항상 긍정적인 의미일 수는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로렌스가 받는 시선에는 그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여전히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는 비난과 폭력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온전한 삶이 아니다. 그가 자신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기본적인 경계선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렇기에 그는 ‘일반적인 시선’을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타인에게 여장남자가 아닌 그저 ‘로렌스’로 바라보아지고, 불리기 위한 투쟁이다.


   로렌스는 그 투쟁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로렌스와 프레드는 장난처럼 색에 대해 짧게 언급한다. 그 중 일부만 정리해보자면, 갈색은 성적 매력의 부족,  빨강은 분노나 피, 유혹, 열정을 의미한다. 다크 초콜릿의 검정은 자살 충동이나 행복의 박탈로 해석한다. 영화의 초반부, 커밍아웃 이전의 로렌스는 검정 등의 무채색 옷을 입는다. 이후 그의 옷은 빨간색을 거쳐 보라색으로 변한다. 평범하게 자신으로 산다는 기본적인 행복조차 박탈되었던 로렌스가 열정을 뜻하는 빨강을 입는다는 것은, 앞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가겠다는 그의 다짐과 맞닿아 있다. 교실에서 여학생들을 보며 클립을 손에 끼울 때도,  자신이 바라던 모습으로 처음 출근한 날에도 그는 빨간색 옷을 입는다. 그것은 자신이 되고 싶다는 로렌스의 욕망의 표출이자 열정의 표현이다. 또한 빨강은 분노의 색이기도 한데, 그는 빨강을 입은 채로 커밍아웃 이후 사라진 것 같은 평화에 비아냥거리고, 빨간 조명 아래에서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커밍아웃의 가장 첫 단계였던 빨강은 이처럼 열정적이지만 불안정하기도 하다. 로렌스는 그 속에서 희열과 분노,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영화에서 보라색은 오로지 로렌스의 색이다. 오직 그만이 보라색 코트를 입고, 스카프나 귀걸이를 착용한다. 역사적으로 보라색은 성소수자를 뜻한다. 보라색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기도 하고,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보라색이 사용된 때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로렌스가 보라색 옷을 입는 것은 성소수자로서 자신을 되찾은 안정을 뜻한다. 보라색 옷을 입은 로렌스는 빨강의 열정으로 들끓던 로렌스보다 편안해진 모습이다. 그에게는 그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친구도 있고, 안정적인 직업도 있으며, 명성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옆집 소년이 그에게 자연스럽게 대시하기도 한다. 빨강을 입으며 분노하고 투쟁하던 때를 지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그 스스로도 익숙해진 것이다. 그에 따라 로렌스를 보는 카메라 또한 변화한다.  이전까지 갈등이나 대치 상황에서 로렌스를 비추는 카메라는 로렌스의 얼굴을 상대의 실루엣에 가린 채로 반 정도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로렌스는 그런 시선에 대해 올바로 보아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인터뷰 장면에서는 다르다. 그는 인터뷰어에게 자신을 제대로 볼 것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에 따라 카메라는 위치를 바꿔 그를 온전히 바라본다. 다른 등장인물들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로렌스를 별 다를 것 없는, 그저 ‘로렌스’로 담아낸다.


   이 시선은 비단 로렌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주인공이자 로렌스의 주된 갈등 상대였던 프레드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트랜스젠더인 로렌스의 곁을 지키며 함께 하는 프레드에게도 나름의 역경이 존재한다. 그것은 연인으로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내색 없이 받아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레드는 노력하지만, 로렌스 만큼이나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는 로렌스가 포기한 주변의 시선을 낱낱이 의식하며 마음 아파하고, 주변 사람들은 여장남자의 애인 정도로 프레드를 바라본다. 영화는 프레드의 상태 역시 마찬가지로 옷과 앵글로 표현한다.


   러닝타임의 대부분, 프레드의 머리는 빨간색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프레드의 옷 역시 머리색과 비슷한 빨강, 분홍 등의 밝은 원색이다. 그러나 영화의 중후반부로 치닫을수록 프레드의 옷은 파란색으로 물들어 간다. 프레드의 파란색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로, 우울함이다.  빨강을 입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던 프레드는 로렌스의 커밍아웃 이후 감정적 변화를 겪는다.  연인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며, 뒤늦게 알게 된 임신 사실을 숨기며 프레드의 속은 곪아간다.


   카페에서의 이별 장면에서 이러한 프레드를 찍는 카메라는 로렌스를 찍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얼굴의 반만 비춘다. 얼굴이 전부 나오는 것은 프레드가 확실히 이별을 고한 이후이다. 이후 블랙섬에서 프레드는 로렌스와 함께 하는 동안 거짓된 자신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로렌스와 헤어지는 순간 프레드의 얼굴이 카메라에 온전히 담긴 것은, 이전까지 스스로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던 프레드가 그러한 기만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신을 지키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혼 후 마지막 재회 장면에서도 여전히 그는 파란 코트를 입고 있는데, 여기서 파랑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파랑은 안정의 색이다. 매력 없다던 갈색의 머리를 한 채로 파란 코트를 입은 그는 보라색 코트의 로렌스처럼 안정되어 보인다. 그것은 그가 결국 자신은 로렌스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로렌스 역시 마찬가지였을 텐데,  함께 할 때 거짓된 자신을 느낀다는 프레드의 고백은 사실상 관계의 마침표와 다름없다. 진정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로렌스는 프레드에게 과거의 자신과 같은 삶을 살라고 강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별 이후 프레드는 결국 갈색과 파란색이 자신임을 깨닫고, 자신이 이상주의자인 로렌스와 다른 현실주의자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프레드는 그렇게 빨강의 좁은 화장실을 나와 낙엽이 휘몰아치는 갈색의 넓은 세상을 향해 달린다.


   결국 이 영화는 두 인물이 온전한 자신을 지키고, 그것을 향해 달리는 여정이다. 타인의 시선이 닿는 대상이 되거나 온전한 자신으로부터 숨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나서 이름을 이야기하기까지의 여정이다. 그리고 나아가, 다른 수식어 없이 이름만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여정이 아니다. 이들을 ‘로렌스’와 ‘프레드’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영화는 두시간 반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적어도 관객들에게만은, 인물들이 더 이상 투쟁하지 않아도 되도록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30 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투쟁이 2020 년이 지난 현대에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는 것은 슬플 따름이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만은 로렌스가 그저 로렌스로, 어쨌든 로렌스(Laurence, anyway)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한다. 나아가 그들이 누구에게나 온전히 이름으로만 불릴 날 또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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