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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Sep 09. 2022

윤희에게 비평문2_윤희에게, '윤희'가

<이름>을 주제로 한 영화, 첫 번째.

윤희에게, ‘윤희’가       

홍자




윤희에게, ‘쥰’이     


‘나는 아직도 미숙한 사람인 걸까? 상관없어. 나는 이 편지를 쓰는 내가 부끄럽지 않아.’     

 

  ‘쥰’은 가끔 꿈을 꾼다. 그리움이 쌓여 가끔 참을 수 없어지면, 윤희의 꿈을 꾸게 된다. 그러면 그리운 마음이 다시 쌓일 걸 알면서도 종이 위에 마음을 적어 내린다. 그렇게 한소끔 적어 내리면 그래도 내일은, 그리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테니까. ‘쥰’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보내지 않을 편지에 털어놓았다. 윤희에게 닿지 않았어도, 그 마음은 이미 글이 되어 세상에 나왔기에, 적어도 그 무게 만큼은 그리움을 덜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책상 위에 소복이 쌓이기만 하던 편지가 윤희 앞에 떨어지기까지, 보내지 않을 걸 알기에 쓰인 편지가 읽히기까지, 수신자의 이름이 제 역할을 하기까지, 이십여 년이라는 시간과 그 시간을 가득 채운 그리움이 있었다.     



윤희는,

  윤희는 길 한구석에서 담배를 피울 때마저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가족에게 사진 몇 장을 공짜로 인화 받는 것조차 그녀에겐 큰 짐이다. 윤희의 모든 말과 행동과 감정은 한 번 눌러져서 나온다. 딸인 새봄에게조차 본인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참는 것은 이미 오랜 습관이 돼버렸다. 참는 게 일상인 사람, 그래서 더 외로워지는 사람, 바로 윤희다. 그 습관이 생기기까지, 윤희는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을 상황 때문에 참아야만 했고, 더 좋아하고 싶은 마음을 계속해서 억눌러야만 했다. 그 시간 덕분에 지금의 윤희가 되었다.     


 

새봄이는,

  ‘새봄’인 윤희를 닮았다. 웃는 얼굴부터 사소한 말투까지, 작은 취향부터 생활 습관까지. 그런데 ‘새봄’이의 말과 행동엔 거침이 없다. 감정과 생각에 솔직하고, 그래서 가끔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어느 날, 그녀는 윤희에게 담배를 하나 달라고 말하고, 윤희는 그런 모습에 기가 차서 묻는다. ‘넌 대체 누굴 닮았니?’ 그 물음에 ‘새봄’이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엄마 닮았지!’ 왜인지 이토록 당당하고 솔직한 웃음 속에서 윤희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지금의 윤희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서 ‘쥰’을 만났고, 또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며 좋아하던, 그때의 윤희가. 아마 그때 윤희의 웃음도 지금 ‘새봄’이의 것과 같은 모습이었을 거다.     


  우리는 우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완숙해진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익숙해지고 노련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숙해지는 증거는 말과 행동과 감정의 여과에서 나타난다고 확신한다. 이 모든 건 시간의 순기능이며 우리는 그 시간에 따라 마치 초승달이 보름달로 변해가는 것처럼 우리 내면을 하나둘 채워가는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것이 있듯 우리도 시간에 내어주는 것이 있다. 누군가는 시간 속에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값질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는 그 시간 속에서 잃은 것이 얻은 것보다 더 값진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얻게 된 지금의 모습보다 무언가를 잃기 전의 내 모습이 더 진짜 같을 때가 있다. 윤희는 그랬다. 그녀는 시간에 ‘쥰’을 사랑했던 자신의 마음과 그 마음에 솔직할 수 있었던 용기를 내주었고, 대신 그저 견디는 법을 얻었다. 그때에 내어준 것이 너무나 값진 것이었기 때문일까. 윤희는 ‘윤희’를 잃었다.


  ‘저렇게 예쁜 애를 누가 잃어버렸을까?’ 주인을 잃은 고양이 ‘월’을 보며, 그 이름을 지어 준 ‘쥰’이 묻는다. 대체 저렇게 예쁜 아이를 어쩌다 잃어버리게 된 걸까, 윤희는 ‘윤희’를 어쩌다 잃어버리게 된 걸까. 채울 만에 달 월, 우리가 온전한 제 형태를 드러낸 달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달은 항상 온전한 모습으로 있었음에도 시간이 만든 그림자에 의해 제 모습을 다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희도 ‘윤희’였다. 다만, 시간에 내어준 부분이, 그렇게 가려진 부분이 있었을 뿐이다. 그 그림자가 자신과 닮은 ‘새봄’이를 통해 걷히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한 제 모습대로 빛날 수 있었다. ‘새봄’이의 무신경한 ‘엄마는 뭐 때문에 살아’라는 질문과 뒤이어 잔인하게 뱉어낸 ‘엄마 인생을 살아’라는 말. 그리고 어쩌면 억지일 수도 있었던 일본 여행까지. ‘새봄’인 그렇게 윤희가 ‘다 그렇게 사는 거지’라는 말로 덮어놨던 부분을,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마음을 꺼내 보게 했다. 그렇게 윤희는 지나간 시간 속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윤희’를 자기 안에서 찾았다. 더 이상 그녀는 ‘왜 사냐’는 질문에 ‘자식 때문에 살지’라는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 ‘윤희’를 이력서에 적으며 새봄을 맞이한다.      


  달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간에 가리어진 부분이 있을 뿐이다. 우린 완숙해지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언가를 잃고 얻는 연속 과정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때론 시간에 너무 값진 것을 내준 나머지 삶의 이유를 더는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때론 그렇게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다시 찾기도 한다. 마치 초승달 속에 만월이, 만월 속에 초승달이 있는 것처럼.      

 쥰의 마음에 쌓이던 것들이 글로 적혀지기까지, 세상에 나온 글들이 다시 책상 위에 쌓이기까지. 그렇게 쌓이던 편지 하나가 쥰의 고모로 인해 우편함 속으로 떨어지기까지, 그 편지가 윤희를 닮은 새봄이를 통해 윤희에게 오기까지, 윤희의 가리어진 곳이 다시 빛나기까지, 긴 시간을 지나 잃어버렸던 ‘윤희’를 다시 찾기까지, 그리고 억누르기만 하던 마음들 사이로 새로운 봄의 시작을 알리듯 작은 웃음 하나가 트이기까지. 다시, ‘윤희’가 ‘쥰’을 말하기까지.     


‘나도 네 꿈을 꿔’     


‘쥰’에게, ‘윤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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