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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Sep 16. 2022

윤희에게 비평문3_호명의 기찻길

<이름>을 주제로 한 영화, 첫 번째.

호명의 기찻길

아말




   일본에서 온 편지가 있다. 수신인 ‘윤희’라는 이름을 겉면에 단 편지는 일본의 한 우체통에서부터 여러 정거장을 거쳐 한국의 윤희에게 도달했을 것이다. 그 편지를 받아 든 윤희는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편지의 여정을 역으로 밟으며, 윤희는 편지가 출발한 곳에 도착한다. 이처럼 윤희와 편지는 서로의 출발과 도착이 맞물려 있다. 편지의 출발부터 다시금 윤희의 출발까지, 영화는 몇 개의 정류장이 찍혀있는 거대한 선로를 마치 기차처럼 따라간다.


   편지는 호명을 필수로 한다. 보내지 않은 편지는 호명이 필수적이라 할 수 없지만, ‘누구에게’라는 목적지가 생긴 편지는 수신자의 이름을 필수적으로 호명해야 한다. 준의 편지가 도착하기 이전 윤희의 삶은 호명되는 삶이라 할 수 없다. 그의 편지함에 놓인 것들은 편지보다는 우편물이다. ‘윤희’라는 개인을 호명하는 것이 아닌, 한 명의 납세자를 호출하기 위한 고지서들 뿐이다. 더군다나 윤희의 직업은 직원 식당의 배식사이다. 윤희 개인이 두드러지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주로 ‘아줌마’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지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특색 없는 아파트에 살며 무채색의 옷을 입는 윤희는 몰개성의 최전방에 있으며, 가장 흔하게 볼 수 있고 생각하는 중년의 여성이자 어머니의 모습이다. 자신보다 자식을 위해 살고,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윤희에게서 개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영화 전반을 뒤덮고 있는 눈처럼, 윤희라는 인간 개인의 모습은 폭력적인 ‘보편’의 모습에 가려져 있다.


   윤희가 오로지 자신이 되는 것은 하루 중 아주 짧은 시간, 그가 집에 가기 전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다. 그마저도 딸 새봄이 모를 정도로 비밀스럽고 간결하다. 사방이 뚫린 가로등 밑에서 태우는 담배는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편하게 해주지도 못한다. 근처로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멋쩍게 등을 돌리고 담배를 가린다.

그런 윤희에게 도착한 준의 편지는 윤희를 호명하는 역할을 한다. 몰개성 이전의 윤희의 삶을 되짚어주는 알람이자 그것을 따라 출발할 수 있도록 하는 각성제로 기능한다. 오랜 기간 묻어둔 윤희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그는, 윤희의 입장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우연의 일치였을 새봄의 요청에 따라 편지가 출발한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영화는 여행길에서 윤희 모녀가 탔을 수많은 교통수단 중 기차에 주목한다.


   이름을 되찾는 과정에 있는 윤희가 기차를 타는 것은 호명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기차는 이름과 이름 사이를 달리는 교통수단이다. 역과 역 사이를 달리는 기차의 모습은 보편에서 호명으로 달리고 있는 윤희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다. 더군다나 기차는 필연의 길을 달리는 존재이다. 기차는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을 달린다. 따라서 그가 달리는 길은 존재와 동시에 만들어진 필연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기차는 언제나 흔적을 남기는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기차는 필연적으로 철로로 다녀야 하므로, 기차가 지나간 길은 철로로 남는다. 결국 호명의 역으로 기차를 타고 달리고 있는 윤희의 삶은 그 자체로 필연이라 볼 수 있다. 보편의 삶을 지나오면서도 윤희는 삶의 흔적을 남겼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다시 호명의 역으로 향한다.


   도착한 일본에서 윤희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가장 먼저 그녀의 옷이 변한다. 간편한 패딩을 주로 입던 그녀가 일본에 와서 코트와 목도리를 꺼낸다. 원래 윤희 것이었다가 새봄의 것이 되었을 목도리는 다시 윤희에게 돌아왔다. 머리를 신경 써서 묶고, 거울을 보며 귀걸이를 대어보는 그녀는 한국에 있을 때와 사뭇 다르다. 또 다른 변화는 새봄과의 관계이다. 어쩐지 서로에게 모난 말만 뱉어내던 두 인물의 관계는 일본에 와서 눈에 띄게 친근해진다. 서로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마주 보며 웃기도 한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새봄의 카메라에 윤희가 담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봄의 피사체는 주로 풍경이나 사물, 동물과 같이 존재하지만 호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새봄은 사진을 찍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의 흔적을 포착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인물이다. 새봄의 행동은 그 나름의 인식과 호명의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봄은 인물 사진을 찍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이름이 있고 호명되며 살기에, 새봄의 기준에서 그녀의 피사체가 되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새봄이 윤희를 피사체로 삼기 시작했다. 준의 편지를 읽는 과정에서 새봄은 윤희가 호명되지 않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윤희의 몰개성과 보편이 자신의 탓이라 느꼈을 것이고, 윤희에게 자신의 존재가 짐이 되었나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봄의 고민은 비뚤어진 방향에서 끝나지 않는다. 새봄은 윤희를 다시 호명되는 존재로 돌려놓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고, 카메라를 들었다. 마치 그 자신의 이름처럼, 새봄은 윤희를 덮고 있던 눈을 녹이며 윤희의 존재를 드러낸다.


   새봄 말고도 눈을 치우는 인물이 또 있다. 준과 그녀의 고모 마사코이다. 이들은 영화 내내 끝없이 내리는 눈을 줄곧 치워낸다. 그 과정에서 준은 툴툴거리기도 하고,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고 한탄하는 마사코에게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냐며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준은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하는데, 료코와의 식사 자리에서 떠보는 듯한 료코의 말에 숨기고 살던 것은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라고 조언한다. 이것은 동성을 좋아하는 준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준은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윤희에게 종종 편지를 쓰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스스로를 호명한다. 준의 그러한 꾸준함은 그녀가 눈을 치우는 모습과 비슷하다. 눈이 그 자신을 덮는 것은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준은 그런 눈을 치워낸다.


   윤희와 마찬가지로, 준 또한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윤희를 만난 직후이다. 줄곧 불평없이, 한 구석을 포기한 채로 눈을 치우던 준이 마사코의 대사를 이어받는다. 윤희와 함께 걸어가며 ‘눈이 언제 그치려나’라고 말하는 준의 모습은 불평보다는 희망에 가깝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해 온 윤희를 만나고 준은 눈이 그치길 소망한다. 그것은 지금껏 눈처럼 덮어놓고 포기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한 구석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작은 새 봄의 싹이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도착한 윤희는 다시 출발한다. 이번에는 여행지가 아닌 그녀의 새로운 삶을 향한 출발이다. 그녀는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며 준에게 답장을 쓴다. 답장은 새로운 편지의 출발이자 이전 편지의 온전한 마무리이다. 윤희의 호명을 향했던 편지의 여정은 마무리 되었고, 윤희는 다시금 호명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출발과 도착이 맞물린 여러 개의 역을 지나온 윤희의 편지는 마무리되고, 다시금 준을 향한 편지가 출발을 맞고 있다. 눈이 그치길 소망하는 준과, 새 봄에 도착한 윤희의 여정이 편지의 정거장 중 어느 한 군데에서 만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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