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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Sep 30. 2022

존 말코비치 되기 비평문1_I가 U보다 앞에 와야 해요

<이름>을 주제로 한 영화, 두 번째.

I가 U보다 앞에 와야 해요.

토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비슷한 단어의 배열이더라도 조사나 어미만으로 의미가 달라지는 문장들이 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작품에 이러한 방식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곤 한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크레이그는 말코비치 속에 들어갔다 나온 라티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시적인 흥분이야. 남의 눈을 통해 세상을 봐서 그래.(It's just a phase. It's the thrill of seeing through somebody else's eyes.)” 한편 영화의 후반부에 레스터 박사는 라티에게 ‘관문’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영원히 타인의 눈으로만 세상을 봐야 한다오.(forever doomed to watch the world through someone else's eyes.)”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전자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긍정적으로, 후자는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대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다른 사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의 차이점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닐 기회, 즉 내 이름으로 존재할 기회의 유무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바로 그 기회를 잃어버리는 비극에 대해서 괴랄하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나 자신으로 존재할 기회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의 소중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무언가의 소중함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는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부재할 때이므로 우리는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못할 때, 그리고 그것을 자각할 때에야 스스로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레스터 사의 행정 연락관인 플로리스는 카드를 정리하던 크레이그에게 “I가 U보다 앞에 와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는 말코비치의 몸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나’와 ‘너’의 순서를 계속해서 뒤바꾸는 인물들에게, 그들이 그 관문을 발견하기도 전부터 내려진 지침이었다. 인물들은 ‘나’와 ‘너’의 순서를 뒤바꾸면서 타인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삶을 경험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물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을 선택한 대가로 스스로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된다. 존 말코비치가 되는 관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 자신’은 말코비치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게 되고, 현실에는 실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과 이름만이 남아있는 것, 두 가지 모두를 영화 속 대사를 빌려 가리키자면, ‘U가 I보다 앞에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이름이 존재하는, 즉 돌아갈 곳이 있는 상태를 I가 U보다 앞에 있는 상태라고 정의한다면 크레이그와 라티의 욕망과 그것의 실현, 그리고 상반된 결말까지도 하나의 맥으로 꿰어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크레이그의 욕망을 들여다보자. 그는 인형 조종사로서 성공하기를 원했고, 그로 인해 형편이 나아지기를 원했다. 또한 맥신을 만나고 난 뒤로 그는 맥신에게 사랑받기를 지독하게 원했다. 크레이그는 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코비치를 이용했다. 그는 말코비치 안에 들어가 그를 조종해서 맥신과 결혼했고, 그의 명성을 이용해 인형조종사로서 이름을 떨쳤다. 말코비치의 부와 명예는 크레이그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크레이그는 사라졌다. 모든 것을 가진 듯한 그 시간 동안, 크레이그에게는 U가 I보다 앞에 있었다.



   한편 라티는 영화의 초반에 크레이그에게 아이를 갖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묻는다. 말코비치의 몸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는 남성이 되는 것을 원하는가 싶더니, 말코비치의 몸으로 맥신을 만난 뒤에는 크레이그와 마찬가지로 맥신에게 사랑받기를 원했다.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라티 역시 말코비치 속에 들어가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지만, 크레이그의 방해 때문에 저지당한다. 시간이 지난 뒤 라티는 맥신을 뒤쫓아 다시 말코비치 속으로 들어가 추격전을 벌인다. 그러던 중 맥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자신이 말코비치였을 때 가진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라티는 말코비치 밖으로 나와 맥신과 그녀의 아이를 새로운 가족으로 맞이한다. 말코비치가 아닌 라티의 이름으로 존재할 때에서야 그녀는 그토록 욕망하던 맥신, 그리고 아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라티에게는 I가 U보다 앞에 있었다.



   반면 크레이그는 말코비치의 몸에서 쫓겨난 뒤에도 맥신을 향한 욕망을 저버리지 못하고 다시 말코비치 속으로 들어간다. 또다시 U가 I보다 앞선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말코비치의 44번째 생일이 지나면서 크레이그가 그의 딸인 에밀리의 머릿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조종하지 못하고 영원히 에밀리 안 갇혀 행복해하는 라티와 맥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I와 U의 순서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크레이기는 그렇게 세상에서 지워졌다.



   다른 사람의 명성을 빼앗을 수 있다면, 잠깐 동안 내가 선망하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기회를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나의 이름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행위가 남의 이름을 단순히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탈취’하는 것이라면. 그 기회가 말하자면 ‘말코비치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면 이 영화를 본 우리는 아마도 그것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U를 I보다 앞에 두는 것이 결코 건강하고 아름다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기괴하고 섬뜩한 방식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I는 U보다 앞에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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