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독서와 글쓰기에서 '믿음'이라니? 의아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단어를 접하면, 종교가 먼저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믿음의 대상은 분명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 일지라도 괜찮습니다.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돌이켜보면, 저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는 똑똑하지 않아", "나는 머리가 좋지 않아"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근거라고 말하기에는 불분명한 것들이었는데 말이죠. 시험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공부 잘하던 학우들과 비교해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IQ 검사를 받거나 지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근거라고 말하기에는 빈약한 몇 개만으로 '머리가 좋지 않다'고 규정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쉽게 한계를 지은 모습을 보면 명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요.
이런 모습을 심리학에서는 '고정 마인드셋'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똑똑하지 않다"고 규정하니, 스스로에 대한 기대 역시 줄어들었습니다. 공부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나 좋은 학원이나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정해진 운명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이런 현상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반복된 실패 경험이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굳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사례로는 '서커스 코끼리'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코끼리는 말뚝에 묶여 지냅니다. 처음에는 말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하지만 어린 코끼리의 힘으로는 말뚝을 뽑기에는 역부족이라서 늘 실패합니다. 이런 실패들이 누적되면서 코끼리는 좌절을 학습합니다. “이 말뚝을 벗어날 수 없어”라는 믿음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코끼리는 포기를 해버립니다.
놀랍고, 안쓰러운 사실은 코끼리가 다 자라서 거대해진 후에도, 여전히 그 작은 말뚝에 묶여서 지낸다는 점입니다. 뽑아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이 있음에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릴 때 학습한 “할 수 없어”라는 믿음이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도, 시험해보지도 못한 채로 말이죠. 결국 '학습된 무기력'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존재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조차 스스로를 과소평가한 채 살아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과 시간이 지난 후의 자신은 분명히 다름에도, 지난 과거에 묶여 그때 형성된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모습에서요. 도전보다는 이전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요. 이미 합리화를 마쳤으니, 불안전한 믿음이지만 순간의 잔잔함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좋지 않음에도, 낯선 것보다는 익숙함을 따르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줄어드니,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공부 해봤자, 안 돼"라고 쉽게 단정하고, 책을 읽어도 "나는 이해력이 부족해"라고 미리 결론 지었습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거 봐, 안 되잖아"라고 쉽게 낙심하고, 안 된다는 믿음을 더 강화시켰습니다. 더 심각한 건, 이런 믿음이 스스로 증명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캐롤 드웩은 이를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라고 명명했습니다. "나는 못해"라고 믿으면, 실제로 노력을 덜 하게 되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역시 나는 못하는구나"라고 확신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 믿음이 정말 사실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사실이었다면,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한계 짓던 믿음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테니까요. 뿐만 아니라, 쓸 내용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었을 테니까요.
부정적 생각의 악순환에 빠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노력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도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보지 못해 좌절한 것일 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좌절의 반대 이면에는 스스로에 기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대(expectation)'는 '미래에 관한 믿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미래와 가능성을 닫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깊은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힘써 닫으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스스로 닫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겠지요.
첫 번째는 '인지'입니다.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들은 무척 오래되어서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경험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자조 섞인 언어로 "나는 안 돼", "해봤는데, 나랑은 안 맞아"라고 쉽게 단정 짓는 것 역시,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스스로를 규정하는 언어 모두는 '고정 마인드셋'의 믿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우리의 능력은 '사람은 죽는다'와 같이 고정된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고정 마인드셋'에 대해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한정짓는 것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정짓는다는 것은 시도하기도 전에 스스로 선을 긋는 것입니다. 반면,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시도해본 후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가능성을 닫지만, 후자는 성장의 시작점이 됩니다.
두 번째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갖고 있는 믿음과 다른 내용을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대개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믿음을 버리는 것보다 새로운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이미 지어진 건축물에서 돌을 빼는 것보다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 게 더 낫습니다.
앞서 언급한 캐롤 드웩의 연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수십 년간의 연구를 통해 그녀는 능력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발 가능한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뇌는 평생에 걸쳐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사실을요. 뇌과학의 '신경가소성'은 “배움에는 때가 있다”, “나는 이미 늦었다”는 말을 부정합니다. 신경가소성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연습할 때마다, 뇌의 신경회로가 재구성된다.
'배움을 멈추지 않는 한, 계속 변화한다'는 의미입니다. 런던 택시 기사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런던은 2만 5천 개가 넘는 거리와 수만 개의 명소로 복잡하게 얽힌 미로 같은 도시입니다. 런던 택시 기사는 평균 3~4년에 거쳐 이 모든 경로를 외운다고 합니다. 신경과학자 엘리너 매과이어는 이들의 뇌를 스캔했습니다. 놀랍게도 택시 기사들은 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인 '해마(Hippocampus)'가 일반인보다 유의미하게 컸다고 합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경력이 길수록 '해마'가 더 컸다는 점입니다. 복잡한 길을 외우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뇌가 변한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못해”라는 믿음에 균열이 생깁니다.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한정지었던 이유 역시 단순했습니다.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지요. 또한, 이 책을 쓸 수 있는 것도 여러 지식을 접하면서, 한정짓는 언어와 자조의 언어는 대개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서가 이에 대한 지식들을 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경험과 연구 결과를 접할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실패를 극복했는지, 어떤 과학적 사실이 우리의 상식과 다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지식들이 쌓이면 기존의 믿음은 자연스럽게 흔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민하고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지금처럼 살 것인가, 발전을 위해 애쓸 것인가를 말이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머리가 좋지 않다”는 믿음을 사실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다른 가능성들을 알게 되었고, 조금씩 시도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완벽하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변할 수 있다”, “개선할 수 있다”와 같은 희망의 언어들을 얘기하지만,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해봤자 의미가 있나?” 하는 좌절과 한정 짓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적어도 “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라는 시도의 생각을 해본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향한 믿음이 바뀌면, 행동 역시 바뀝니다. 그리고 행동이 바뀌면, 결과 역시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변화를 만드는 가장 좋은 도구는 '독서와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관점을 접하고,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도 할 수 있구나”를 조금씩 체감하게 되었고, 이제는 비교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독서를 시작했을 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입니다. 당시에는 두려움과 걱정을 스스로 찾아다녔습니다. 그때의 부족함과 불안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수동적인 입장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질문이지만, 그 성격이 다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왜 이렇게 된거지?"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과거에는 할 수 없는 이유들과 안절부절하며 합리화를 위한 탐색이었다면, 지금은 개선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탐구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는 방법을 찾는 질문이고, “왜 이렇게 된 거지?”는 원인을 파악하는 질문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는 행동을 계획하는 질문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질문 앞에 다르게 반응하는 이유 역시 믿음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뀝니다. 행동이 바뀌면 결과도 달라집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이 바뀐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또한, 믿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이죠.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에 있는 '세 마리 개구리' 이야기를 각색한 내용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햇살이 강렬한 여름날, 개구리 다섯 마리가 통나무에 올라탄 채 유유히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통나무가 강 중간쯤 이르렀을 때, 그 중 두 마리가 각각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더워, 난 물속으로 뛰어들 거야!”, “여기는 너무 좁아. 더 넓은 통나무를 찾아나설 거야!” 다른 개구리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 이제는 몇 마리의 개구리가 통나무 위에 있을까요?
어쩌면 세 마리라고 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야기에서는 여전히 다섯 마리 개구리가 통나무 위에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뛰어 들겠다'는 결심과 정말 결단하며 뛰어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뛰어들지, 또는 다른 이유를 찾으며 다시 앉을지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낯설지가 않을 것입니다. “뛰어들겠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겠다”라고 큰 소리만 치는 개구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인지하고 지식을 쌓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확신이 “어쩌면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으로 바뀌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으니까요. 또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불신이 곧바로 확신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개구리가 뛰어들지 않았을지라도, “뛰어들어야지”라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적어도 통나무 위에만 영원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믿음은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못해”라는 단정의 언어를 따르거나, “해볼 수 있어”라는 희망의 언어를 따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제 이렇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믿음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행동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바로 '습관 형성'입니다. '학습된 무기력'에서 벗어나, 부정적인 자기 충족적 예언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