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사람은 나누어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나누어 생각하는 이유는 단연 이해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자신의 사고체계를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다.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해의 범주 안에서 추론하고 해석할 따름이다. 혹은 비난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모순적인 모습에 대해 비난하는 이유는 뭘까? 자신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예측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그 예측이 깨진 것이다. 모순적인 모습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다 따져가면서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럴수록 관계는 어려워지고 피폐해지는 건 본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준을 정해 나누어 생각하거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나누면 나눌수록 이해하기 쉬워진다. 일반화 작업을 하는 셈이다. 일반화는 자신의 인식 범위 안에서 예측하고 재단하는 것을 뜻한다.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 가능한 범주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 일반화의 특징이다.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탓에 일반화는 많은 오류를 동반한다. 항상 예외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이해하기 위해 일반화할수록 혼란만 가중되는 것이다.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에는 '합리화'가 있다. 일반화가 인식 범위 '안으로' 대상을 넣으려는 시도라면, 합리화는 자신의 인식 체계 '안에서' 대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 흔히 취하는 방법이다. 직면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탁월한 방법인 셈이다.
이해를 위한 방법으로 일반화와 합리화는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쁘지 않다. 다만, 이해하기 위한 단계에서는 괜찮지만 상황이나 다른 사람을 재단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건강하지 못하다.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는 괜찮지만 온전히 바라보지는 못하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일반화와 합리화를 통해서라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뇌가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위한 시도는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때론 이해하기 위한 일반화와 합리화는 선입견으로 자리 잡아 이해를 거부하는 경우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해하고 싶은 욕구의 기대와 달리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는 선입견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이해하려 했지만 이해를 거부하게 되는 모순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입견을 깨는 도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경험'이라는 도구다.
예전에 연탄봉사를 간 적이 있었다.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곳을 제외하고 사방으로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머지않아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이사 가야 할 상황이 분명해 보였다. 집들은 대부분은 허름했다. 이동하면서 작은 강아지와 큰 개를 키우고 있는 집들을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반려동물을 어떻게 키우지? 그 돈 한 푼이라도 모으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모든 것을 돈과 관련지어 생각했던 때의 일이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해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느닷없이 1년도 채 안 된 말티즈 한 마리를 데려왔다. 원래 상의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돈도 없는데 무작정 데려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원비나 사료값 등 돈에 관한 걱정이 앞섰다. 월세 가지고도 수없이 싸우면서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어린 녀석을 밖에 내놓을 수도 없었다. 녀석이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어느덧 함께 한지 10년이 넘게 함께 지내다가 24년 2월 얼마전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녀석을 데려오고 나서 한 5년이 지났던 때였을까. 밖에 나서려고 문을 열었는데, 지나가던 작은 말티즈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계단을 뛰어올라 오더니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주인을 찾으려 애썼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쩌다보니 둘째까지 들이게 됐다. 다행히도 녀석들은 서로 잘 지냈다. 서로에게 배워가며 없던 첫째에게 없던 애교가 생겼고 경쟁심리 탓일까 밥도 잘 먹는 모습이 생겼다. 예전에는 집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이틀이 멀다하고 싸우며 욕하는 그 환경이 싫었고, 일상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각자의 분에 못이겨 현관문을 세게 닫고 수저와 그릇을 세게 놓는 소리 등 짜증과 분노가 섞인 소리들이 괴로웠다. 그래서 집에서는 입을 닫고 지냈다. 하지만 녀석들과 함께 지내면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침묵과 여러 괴로운 소리들만 있던 집에 웃음꽃이 피었다. 녀석들의 코골이 소리만 들어도 웃음이 나왔다. 베개에 누으면 양쪽 귀에 엉덩이를 대고 하나씩 자리 잡았는데, 양쪽으로 번갈아 들리는 녀석들의 심장소리에 미소가 지어지고 작은 행복을 느꼈다. 공허했던 마음에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각만 해도 들어가기 싫었던 공간에 반겨줄 녀석들을 생각하면 어느순간 작은 미소가 지어지는 나를 발견했다. 웃음이 없던 인생에 웃음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연탄봉사 갔던 때가 떠올랐다. 그분들이 반려동물을 키웠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반겨주는 모습, 본인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주는 존재, 공허한 TV소리 외에 살아 있는 소리가 하나의 기쁨이자 희망이지 않았을까. 이렇게 계획보다 먼저(先) 들어온(入) 강아지(犬)가 나의 선입견(先入見)을 깬 순간이었다.
이처럼 작은 세상에 갇혀 있던 생각을 깨주는 건 하나의 경험이다. 경험은 선입견을 깨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선입견이 깨지면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시야가 넓어져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금 생각해 볼 여유와 이유가 생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또한 삶이 충만해지기 시작한다. 씨가 발아하듯 생명력이 샘솟기 시작한다. 선입견이 깨진 순간이 바로 변화와 성숙을 알리는 신호라 할 수 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며 변화와 성숙을 촉발한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맛보는 순간이다. 이런 시간들이 쌓일수록 자신만의 인식은 짙어진다. 경험과 생각, 보고 들은 것으로 자신만의 믿음과 사고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보고 들은 것에 의한 생각과 경험이 자신을 설명하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