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둔필승총(鈍筆勝聰)
둔한 붓이 총명함을 이긴다
시간이 지나면, 총명한 사람일지라도 기억은 희미해진다. 하지만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순간의 깨달음도 적어두지 않으면 결국 휘발되고 만다. 기록은 나의 경험과 생각을 붙잡아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이자 선물이다. 둔한 붓이 총명함을 이긴다는 말처럼, 꾸준한 기록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이다. 한 줄이라도 적는 습관이 결국 나를 성장하게 만든다.
기록하면 좋다는 얘기는 여러 책이나 영상을 통해서나 기록하는 사람을 보며 느꼈을 것이다. 마치 "독서하면 좋지"와 같은 느낌이랄까. 이미 여러 차례 다짐하고 시도했을 수 있다. 모든 게 그렇듯,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과 내게도 좋은 것은 별개이다. 기록하는 것은 수고스럽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거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일상에서 여러 기록을 하고 있다. 많은 시간과 사건을 겪으며 지내지만 기억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기억 역시 자신만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어렸을 적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 누군가 했던 말, 기억나는 문구 같이 삶에 기록된 내용들이 있을 것이다. 다만 기억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원할 때마다 회상할 수 없다. 의지만으로 기억을 불러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게 어느 순간 떠오를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경험과 기억은 비례한다. 경험이 많을수록 기억하는 장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험은 단순히 활동한 이력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행을 가거나 어떤 일을 해왔는지는 경험의 일부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여행을 다니지 않더라도, 혹은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해보지 않더라도 경험은 충분히 쌓을 수 있다. 경험이란 자신에게 의미가 부여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보내는 모든 것이 경험이 될 수 있다. 독서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것 역시 경험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통찰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면 경험을 얻었다 말할 수 있다. 삶의 기억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닐지라도 삶에 영향을 준다면 경험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간접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실제 경험 역시 한계는 존재한다. 상황은 항상 다르고 시대는 빠르게 변하기에 더욱 그렇다. 경험이 절대화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간접 경험이든 직접적인 경험이든 둘의 효과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누군가의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경험만이 최고인 것도 아니다.
경험(經驗)은 지날 경(經)과 시험 험(驗)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이다. 단어의 조합에서 알 수 있듯이, 경험이란 시험을 지나가는 과정이나 지나온 시험을 뜻한다. 그렇다면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시험을 통과한다는 말은 합격했음을 의미한다. 인생의 시험에서 합격은 단순하다. 이 시험은 주관식이라서 정답이 없다. 또한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험 역시 다르고, 기간과 출제범위 모두 다르다. 그러나 인생의 시험은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나 통과할 수 있다. 그저 답을 어떻게 작성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뿐이다.
삶의 기록은 나이만큼의 세월이 아니라 어떤 시간을 보냈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만의 밀도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은 장애물 달리기와 같다. 어떤 장애물은 쉽게 통과하지만, 어떤 장애물에서는 흙이 묻기도 하고, 넘어져 상처가 나기도 한다. 힘들게 장애물을 통과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빠르게 통과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조급해지기도 하고 뒤쳐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코스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 장애물들을 통과하면서 역량이 발현되기도 하고, 고전하는 가운데 새로운 역량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경험이 늘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삶의 기록이 하나씩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