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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영 Jul 28. 2021

기억 1.

“친족성추행”.... 이 단어를 알게 되었다.



어? '속옷'을 안 입고 외출했잖아??

속옷이니깐 아무도 모를꺼야...

그러고 보니 '하의'를 안 입었네? 큰일 났다!!!

집을 찾아 냅다 달리는데... 나는 '상의'도 안 입은 채 발가벗고 뛰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깼다. 벌써 몇 번째... 아니 몇 백 번째 반복해서 꾸는 꿈이다.     


남들에게 “나”와 “내 삶을”... “내 상처”... 를 들키고 싶지 않아, 나는' 밝고 씩씩한 사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긍정의 아이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나는 그렇지 않다. 매사 누군가에게 “내”가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살아온 시간만 17년이다(가정폭력). 아니 40년(친족성 추행)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고단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유독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피로감’을 느낀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말하지 않는 시간’을 좋아하지만 사람 들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나에게 친구들은 ‘비밀’도 잘 털어놓지만, 나는 ‘나의 비밀’을 꺼내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생각도 든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내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롱 패딩’을 입고 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누군가 에게 나의 뜬금없는 ‘노출’또한 당황스러운 것이 되겠지만,

적절한 '수위'만 조절해 준다면, '나'도'상대'도 상처 받지 않고 서로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계절에 맞는 옷’을 입고 살아가도 될 만큼 '나'도, '사회'도 성장했다고 믿고 싶다.

‘내’가 ‘나’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에게 ‘가볍고 편한 옷’을 마련해 주고 싶다.    


               


외갓집에 ‘이종사촌’들이 모일 때는 늘 즐거운 '놀잇거리'가 가득했다.

이모들은 딸만 줄줄이 낳아 외갓집에 모이는 ‘이종사촌’은 여자 아이만 10명이다.

각기 나이도 비슷해서 우리는 ‘인형놀이’도 하고 ‘역할놀이’도 하며 놀았는데, '명절'이나 '외할머니 생신'같이 서로 만나 놀 수 있는 날에는 아침부터 ‘오늘은 뭐하고 놀게 될까?’ 하는 기대감으로 오전부터 설레며 외갓집을 갔다.


외할머니는 큰 이모와 함께 사는데, 그 집 식구 구성원은 '외할머니', '큰 이모부', '큰 이모', 그리고 '이종사촌오빠' 이렇게 넷이 산다. '사촌오빠'와 '우리'는 나이차가 좀 있었는데. 우리 10명이 ‘초등학생’ 일 때 사촌오빠는‘고등학생’ 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인형놀이’로 시작해 ‘역할놀이’(주로 ‘신데렐라’ 놀이나 ‘베트맨’ 놀이를 한다.)를 하며 재밌게 놀았고, 어른들은 갖은 음식에 반주도 한잔씩 걸치셨다.

술을 드시는 어른들을 보고는  “밤늦게 까지 놀 수 있는 더 없는 기회다!” 하면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놀았다. 그리고 밤이 늦자 이모들은 우리가 노는 방에 들어와 “오늘은 자고 간다”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모두 너무 신이 났다.


우리가 가끔 외할머니 집에서 잠을 잘 때면 외할머니는 잠을 자고 있는 우리 머리맡에 와서 한 명씩 정성스럽게 로션을 발라주고 가셨는데, 잠자리가 바뀌면 깊은 잠을 못 드는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방문을 슬며시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나는 외할머니가 다시 와서 ‘우리 잠자리를 봐주시는 가?’하며, 있다 놀래킬  생각으로 조용히 자는 척을 했다.


그런데....


문 앞 맨 바깥쪽에 잠을 자고 있던 나에게 다가온 것은 외할머니가 아니었다.


조용히 내가 덮은 이불이 젖혀졌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이 나의 ‘소중한 곳’에 닿는 느낌이 났다.


‘어? 할머니가 아니잖아????’

그 사촌오빠였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외할머니를 부를까? 생각했지만, 왠지 그 손이 있는 위치가,,,,,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외할머니’든 ‘이모’든 ‘이모부’든 ‘누구든’ 알게 되면 '나 때문에' 왠지 모르게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어린 나는....‘잠을 자느라 나도 '이 일'을 모르고 있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열심히 자는 척을 했다. 그 ‘괴물 같은 손’이 거둬지는 데는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는 몇 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잠결에 심한 몸부림을 치듯’ 연기하며 옆에서 자고 있는 ‘사촌동생’을 깨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 다리로 옆 사촌동생을 세게 걷어차자, 사촌동생이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사촌오빠는 급하게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때 든 어린 나의 생각은 ‘이제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일수 없을 거란 생각’과....‘그 사촌오빠를 예전같이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이 오자, 나는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엄마 이제 집에 가”

“새벽에 왜 가..... 있다 아침 먹고 갈 거야”

“그냥 집에 가자. 숙제도 덜 했어”

“아침 먹고 코코아도 먹고 그러고 가자, 가서 더 자”

(나는 외할머니를 “코코아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그때는 '코코아' 같은 간식이 귀할 때라, 외갓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코코아’를 나는 늘 기대했었다.)


평소와 다르게 때를 써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이후로 아침을 어떻게 먹었는지 외가 집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없다.


그리고 ‘외갓집’을 가면 어김없이 ‘괴물의 손’이 다가오길 몇 번...

나는 늘 ‘잠에 취한 척’을 해야만 했고,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외갓집을 가지 않겠다고 갖은 핑계를 댔다.


나만 모르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이 될 거라는 어린 나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그 생각은 40이 넘은 내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 내 안의 모든 것을 뒤틀어대고 있다.


그때 그것이 그저 ‘폭력’ 임을 알았더라면....

그때 그것이 '혼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때 그것이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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