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는 관계에 대한 많은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 환상의 창을 통해 타인들을 바라봤다.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도 그 창 안의 아름다운 풍경 속 인물로서 바라봤다(나는 유독 친구와 스승에 대한 커다란 환상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관계가 어그러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그들이 요구한 적도 없는 내가 만든 환상들 때문이었다. 그 환상의 풍경에서 어긋나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실망하고 서운해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이 케케묵은 환상의 창들을 하나둘 버리고 있다.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관찰하고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사고의 연쇄 현상이다. 이제껏 나에 대해 갖고 있던 과도한 기대감을 버리면서, 나라고 믿어왔던 것들의 대부분이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타인에 대한 나의 판단 또한 그들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미지가 그 사람의 본질과 일부분 닿아 있을 수는 있어도 본질 그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개인의 본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창을 거두었을 때, 나의 꿈과 욕망, 집념이 만들어낸 모든 환상의 창을 제거했을 때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무엇이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남아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내가 나 자신과 타인을 창 안의 인물로서 바라봤듯이 나 역시도 누군가의 창 안에 존재하는 타인일 것이다. 타인이 내게 씌운 환영이 결코 ‘나’라고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만든 환영만이 '나'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부여한 무수한 환영의 중첩으로 빚어진 어떤 이미지의 총체인 것이다.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무수히 중첩된 환영 그 자체가 아닐까? 무수한 환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고 변형되고 뒤집히면서 변화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 결코 그 본질을 한 가지 성질로 확정 지을 수 없다.
나와 타인에 대해 갖고 있던 낡은 환상의 창들이 사라지니 요즘 점점 또렷해지는 새로운 창이 하나 있다. 관계에 대한 허황된 환상을 좇았던 정신이 이제 한 가지 이미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얼토당토않게 품었던, 망상 같은 환상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지금의 내가 도달할 수 있을 법한 소박한 환상이다. 현실적이고 소박한 환상이기에 오히려 더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 창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사뭇 다른 감성과 견고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환상 속의 나만이 ‘나’이고 ‘나’의 본질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