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고 싶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라는 예전의 목표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의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록하는 것, 어딘가에 그 일부를 붙잡아서 사라짐을 지연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목표로 할 만한 일이 아닐까?
2월 말에 그리기 시작한 그림을 5월 중순에야 완성했다. 17x24cm, 이 작은 그림 한 장을 그리는 데 석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비싼 수채 용지 2권과 다수의 세필 붓을 버렸다. 한 장의 완성작에 도달하는 길이 이토록 멀고 고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잘 유지되던 집중력이 무슨 주술에라도 걸린 듯 매번 비슷한 어느 지점에서 흐트러져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그림이 망가져 있었다. 색감이 탁해지거나, 묘사가 튀거나, 인물이나 자동차, 나무 등의 요소가 위치에 맞지 않게 너무 크게 혹은 작게 그려지거나...
분노와 무기력 사이를 수없이 오가는 동안 처음 이 그림을 구상했을 때의 순수한 감흥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이 그림을 꼭 그려야 할 이유도 언젠가부터는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중도 포기의 유혹에 흔들렸는데, 이상하게도 지난겨울, 하얀 거리 위로 금빛 가루를 흩뿌리며 서 있던 가로등과 그 아래로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져 가던 한 모녀의 뒷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 풍경을 종이에 담고 싶은 욕심이 끝내 포기되지가 않았다. 마지막 그림은 거의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라는 식의 오기와 집착의 힘만으로 그린 것 같다.
사실 실패의 대개는 그림의 아주 작은 부분, 어떤 때는 1cm도 채 안 되는 아주 사소한 부분의 묘사 때문이었다. 이 작은 부분이 그림 전체의 분위기와 완성도를 결정지어서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또 같은 실수를 저지를까 봐 일부러 더 그리지 않고 붓을 내려놓았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갯속을 더듬더듬 걷고 듯한 답답함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인생도 이 그림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는. 손가락 한마디 크기도 안 되는 이 작은 부분이 얼마 후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지었듯, 어릴 때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개인의 사소한 면모 하나가 훗날 그의 개성을 형성되는 데 막대하게 기여하고, 그 개성에 의해 인생 전체의 분위기가 결정된다. 자신의 삶이 다른 이의 것과 그 장르나 분위기 면에서 확연하게 달라진 것을 알아챈 후에야, 우리는 그 옛날의 그 눈에 띄지 않은 작은 특징이 지금의 큰 다름의 시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눈앞의 현실이 꿈 많던 어린 시절에 그려왔던 것과 너무도 다를 때 생긴다. 계획대로 되는 삶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절대 피하고자 했던 방향대로 인생이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고 나면, 한순간에 사람은 노련한 어른에서 길 잃은 아이로 쪼그라들게 된다. 당혹감과 두려움에 압도되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어디로 가야 할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깨어남이 재난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정신이 멍해질 때마다 붓을 내려놓고 잠시 그림을 관망했듯이, 일상 속에서도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삶을 타인의 것처럼 냉정하게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건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 그 멈춤 때문에 삶의 여정은 좀 더뎌질지라도 자기 위치와 상태를 어느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편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훗날의 낭패를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설령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의 조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인생이라는 커다란 종이 위에, 한 사람 앞에 딱 한 장만 주어지는 이 하얀 종이 위에 주체성을 갖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일까, 아니면 주체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손에 밴 타성대로 생각 없이 그리고 있는 중일까? 나는 지금 멈춰 선 상태일까, 아니면 걸어오던 관성대로 가고 있는 중일까? 내 삶은 이미 개선의 여지없이 망가진 상태일까, 아니면 아직 많은 여백이 남아 있는 상태일까?
나는 결국 마지막 그림에서 몇 가지 요소에 대해 타협했다. 현재의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을 생략하고 색감과 구도를 살짝 변경한 것이다. 그림에 그때 내가 본 풍경의 인상이 어느 정도 담겨 있는 것으로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이 한 장의 그림에 더 이상의 시간을 빼앗기면, 인생이라는 더 큰 그림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