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개인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다. 여백이 있어야 완성되는 풍경화처럼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면모는 드러난 면모의 배경이 되어주고, 얼핏 동떨어져 보일 수도 있는 그의 다양한 특성들을 한 장 그림으로 묶어준다. 두 영역이 한 사람 안에서 겹치고 충돌하고 어우러지면서 형성하는 어떤 분위기, 그 명확하지 않은 분위기가 그 사람을 세상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돌이켜보면 직장 생활은 내 안의 그러한 여백을 지우려는 어떤 무정한 힘에 치열하게 맞섰던 시간이었다.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지만 간혹 그 속에는 타인의 여백을 좀처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섞여 있었고, 그런 이들은 타인에게서 가능한 한 빨리 모든 안개를 걷어내어 그를 단기간에 파악 가능한 단순한 존재로 만들려고 했다. 때때로 그들이 주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지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런 무성의한 재단 공격에 가끔은 소심한 저항을 해보기도 했는데, 그건 오히려 더 큰 자괴감만 안겨줄 뿐이었다.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내 안의 여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과정 속에서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타인에 대한 존중은 형식적인 예의 이전에 그 사람에게 내가 다 알 수 없는 비밀의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상대에게 감추어진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살갑고 부드러운 말이라도 어딘지 모르게 잔인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타인을 다 파악했다고 선포하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의 복합성을 무시한 채 본질을 함부로 단정 짓는 일은 개인으로서의 그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사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 역시 그런 공격적인 힘에 지배되는 때가 잦아지는 것을 느낀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속으로는 단시간에 남의 몇 가지 정보와 말투, 표정만을 보고 무의식중에 그의 정체를 결론지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또 뜨끔해한다. 과거에 뜬금없는 평가의 말 앞에서 느꼈던 당혹감과 불쾌함이 떠오르고, 내가 그들에게 화를 낼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늙어간다는 것은 이 개인 파괴의 힘에 조금씩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그 힘에 자신이 먼저 먹히고, 이후에는 바깥으로 그 힘을 실은 화살을 쏘아대는 존재가 되는 것.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모든 사람은 이 검은 물결에 서서히 물들어 가다가 죽음과 함께 완전히 그 물속으로 가라앉는 게 아닐까. 그렇게 모든 개체는 결국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그 물듦의 속도를 늦추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안팎에서 밀려드는 이 검은 물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막아낼 수 있을까. 역시 자기 안의 여백을 망각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아무리 나 자신에게 싫증이 나더라도, 누가 나를 아무리 단호하게 결론지으려 하더라도(물론 내가 전혀 동의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면의 비밀 정원을 계속 가꾸는 것, 더욱 다채로운 꽃과 나무로 채워나가는 것. 그것이 그 검은 물을 흡수하고 막아주는 제방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일은 가끔 이 비밀의 정원이 '있음'을 남들에게 인지시키는 것.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만 보여주는 것. 요즘 같은 세상엔 너무 깊이 감추고 있으면 아예 없다고 믿어버리는 성급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의 시선에 완전히 무심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애써 무심해 보려 해도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자아는 무너져버린다.
비밀의 영역을 적절히 은폐하고 적절히 개방하는 것. 그 개방의 선을 상황과 상대에 따라 조정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그런 처세술이 개인으로서의 나의 생명력을 최대한 연장시켜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