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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영역

by 이인영
이인영, <만조>, 종이에 수채, 15.4x19.7cm, 2024.12.



한 사람을 개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다. 여백이 있어야 운치가 더해지는 풍경화처럼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면모는 그의 드러난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가 여느 사람이 아닌 바로 그일 수밖에 없는, 고유한 개성의 소유자로 만들어준다. 개성은 하나의 단일한 성질이 아니다. 여백이 개개의 떨어져 있는 사물들을 한 장의 그림으로 묶어주듯 개인의 감추어진 부분은 그 사람의 다양한 면모 사이의 간극들을 메꿔주어 그에게서 발견되는 여러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를 하나의 결합체로서 인식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개성은 감추어진 부분과 드러난 부분들이 어우러져 창조되는 어떤 복합적인 분위기이다.



감추어진 부분이라는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나'뿐만 아니라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나'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절대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걸으면 걸을수록 안으로 끝없이 확장되는 비밀의 정원을 자기 내면에 갖고 있어야 우리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고, 그러한 호기심에 의한 자기 탐구와 성찰이 생의 끝까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성의 생생함은 변화 속에서 유지된다. 자신에 대한 물음을 그치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한 시점에 결론짓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자신을 어떤 한 프레임 속에 고착시키는 순간부터 개인으로서의 그는 퇴색하기 시작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직장 생활은 내 안의 여백을 없애 버리려는, 내게서 모든 안개를 걷어내어 그 신비의 영역을 분명하고 깔끔한, 단기간에 이해 완료할 수 있는 평범한 세계로 만들려는 어떤 파괴적인 힘과의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그 힘은 내가 속했던 인간관계뿐 아니라 나의 위치, 내가 맡았던 업무의 성격, 사회적 관습 등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으로부터 발산되었다. 모든 외부적 여건들이 너는 어떠한 비밀도 가져서는 안 되는, 어떠한 고유성도 가져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나는 너를 다 파악하고 있어,라고) 끊임없이 주입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무정한 속삭임에 가끔 상처받았고 그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소심한 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 힘에 대응을 하면 할수록, 그 메시지를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은 내 안에서 더 크게 울려 퍼져 빠르게 나의 소중한 비밀 정원을 망가뜨렸다.



점점 황폐해져 가는 나의 은신처를 지켜내기 위해 맞서고 피하고 열고 닫는 행위를 끝없이 반복하면서(때로는 이 은신처의 존재를 일부러 조금 보여줘야 할 때도 있었다. 감추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깨달았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내가 다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상대에게 감추어진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살갑고 부드러운 말이라도 어딘지 모르게 잔인하게 들린다는 것을. 타인이 지닌 여백의 공간에 함부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 타인을 다 파악했다고 선포하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의 가변성을 무시하고 본질을 함부로 단정 짓는 것은 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개인이 개인에게, 사회가 개인에게, 자연이 개인에게 가하는 수많은 직간접적인 힘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개개인이 지닌 비밀의 영역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일지 모른다. 미스터리로 가득한 이 신비로운 세계를 뻔하고 흔한 것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개체로서의 고유한 의미를 무의미화시키는 것, 그것이 그 힘의 최종 목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최종 성패는 이 거대한 파괴 작업에 맞서 나의 비밀을 굳건하게 지켜내는 것, 이 비밀의 영역을 더욱 다채로운 사물과 의미로 풍성하게 채워나가는 것, 이 작업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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