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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유전

by 이인영
이인영, <꿈의 유전>, 종이에 수채, 20.5x15.7cm, 2024.10.



나는 왜 그림을 그릴까? 나는 왜 어릴 때 그리기를 좋아했을까? 나는 지금 이 작업에 집착할까? 이 집착은 내 안의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꿈이 나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내 의지로 만들어 낸 꿈이 아니라 누군가의 꿈을 대신 품고 대신 실행해 주고 있는 듯한 느낌. 그래서 내가 아무리 관두려 해도 누군가가 절대 관두지 못하게 하는 것 같은 느낌. 그게 아니라면 이 병적인 집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무엇일까? 그건 전생의 업이 내 영혼에 새긴 과제일까, 아니면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나의 본성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와 내가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저 붉은 왕의 꿈이 빚어낸 우연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 누군가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만약 본성이라는 것, 어떤 사물이 그 사물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그 무엇, 내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어떤 고유한 성질, 그 본연의 성질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런 사고를 하고 이런 집착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 본성은 또 누가 만들었고, 그것은 또 왜 하필 내게 부여된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그 누구란 없으며 본성은 '자연(自然)', 즉 저절로 그러한 것, 저절로 아무 이유 없이 어느 순간 기(氣)들의 결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부여한 것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전자들조합과 배열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기들이 조화되는 법칙은 또 어떻게 만들어졌고, 하나님이 무수한 개체에 각기 다른 본성을 부여할 때의 의도와 목적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이며 , 한 생명의 유전자가 그렇게 조합되고 배열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본성의 시원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부여한 맨 앞에 있는, 맨 꼭대기에 있는 것은 누구(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겠지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일단 이러한 본성을 부여받은 이상 이것이 나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본성의 형성이 우연에 의한 것인지 필연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태어난 이상 내가 생각하고 욕망하고 꿈꾸는 모든 것, 내게 펼쳐지는 모든 사건들은 필연으로 빚어진 것이다. 본성에 기인한 필연. 이 작업에 집착하고 있는 지금의 나, 몇 년째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하고 이곳에 정체되어 있는 지금의 나는 사십여 년 전 내 안에 이 본성이 형성될 때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꿈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꿈의 진짜 주인인 나의 본성은 도대체 궁극적으로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내 생명력이 주어진무를 다 완수하기 전에 고갈되어 버리면 이 본성은 어떻게 될까? 나의 본성은 오직 이 육신과만 어울릴 수 있는 유일무이하고 유한한 것일까 아니면 지구에 인류가 등장한 이래 줄곧 존재해 온, 수많은 개체를 거쳐 유전되어 왔고 앞으로도 유전될 영원한 것일까?


왠지 후자가 맞는 것 같다. 이 본성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요즘 이 꿈이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나만의 꿈이 아니기에 열정과 체력이 쇠해도 내 의지대로 이 꿈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내 생명이 다하면 본성은 지체 없이 다음 인형을 찾으러 떠날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안에서 피어나(혹은 부여되어) 그의 육신 안에서 다시 자신의 꿈을 펼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꼭 이 꿈을 다 이루어내지 못하더라도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본성이 거쳐 온, 그리고 앞으로 거쳐 갈 수많은 인형들 중의 하나일 뿐이니까. 내가 사라져도 꿈은 영원히 이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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