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그림을 놓지 못하고 있는 여러 이유들 중에는 내게 유독 무례하게 굴었던 몇몇 사람들에 대한 소심한 복수심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나의 어리석었던 언행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미안함이 그림의 강력한 동기가 된 적도 많지만, 솔직히 그런 때조차도 그림이 풀리지 않아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타인을 향한 날카로운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꺼져가던 의욕의 불씨를 되살려 주었다.
이런 자세가 내 그림이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더 세련된 감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타고난 마음의 크기를 인위적으로 넓히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차라리 이 비뚤어진 감정을 기반으로 하여 나만의 개성적인 색채를 만들어 보자,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내 그림에 뒤끝 없는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가 구사할 법한 시원시원하고 강렬한 표현이 부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복수의 방법은 제각각이겠지만, 내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복수는 나의 내면의 존재를 증명해 내는 것이었다. '내면이 없는 인간', '예민하지 않은 인간', '속일 수 있는 인간'으로 취급당한 경험이 만들어낸 어두운 욕망이었다(나는 평범한 외모에 털털한 인상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는 속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여러 번 놀랐다). 조용히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검은 늪지대 같은 이 욕망 속으로 4년이라는 긴 시간이 빨려 들어갔다.
그런데 요즘 세수를 하면서 거울 속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복수심에 속았구나,라는. 확연히라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히 달라진 내 얼굴. 달라진 내 얼굴의 낯설고도 익숙한 느낌. 낯선 느낌이 드는 건 나의 20대 시절의 얼굴과 너무 달라져서 그렇고,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나이 든 엄마의 얼굴이 언뜻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전엔 간혹 동안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젠 미세한 주름도 많이 보이고, 새치도 늘었고, 무엇보다 얼굴 전체에 칙칙하고도 무거운, 초라하고도 초연한 분위기(이 점은 마음에 든다)가 감돈다. 내면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심이 30대의 나의 마지막 젊음의 기운을 다 흡수해 버린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이상한 꿈을 꾼 것 같다. 그 꿈속에서 나는 분노와 우울,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이라는 친구들과 뒤엉켜 지냈다. 때로는 밀어내고 때로는 서로 할퀴고 때리고, 때로는 꼭 끌어안으면서. 낮에는 그들을 하찮게 여기고 외면하려 애썼지만 밤에는 그들을 베개와 이불 삼아 그 속에 푹 파고들었다. 그들은 내 의식의 표층에서부터 심층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떠도는 무수한 기억들을 재료 삼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떻게든 이어지는 미로 같은 꿈의 플롯을 만들어 냈다. 꿈의 미로 속을 헤매는 동안 나는 분노와 우울, 혐오와 연민이 서로 다른 감정들이 아니라 사실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는 하나의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을 깨고 보니 결국 내게 남아 있는 건 노화된 신체와 30여 점의 자잘한 그림 조각들. 이 그림들은 복수라는 거창한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 소박하고 귀엽다. 이런 귀여운 그림들로는 복수, 혹은 존재 증명이라는 비장한 목표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런데 외면적인 변화보다 내게 일어난 더 중요한 변화는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그 욕망이 예전만큼 절실하게 들끓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면을 증명해서 뭐 하나,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번민과 모순, 약점을 알려서 뭐 하나, 수십 년 후면 나와 과거의 인연들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거쳤던 집단들은 광활한 세상의 시점에서 봤을 때, 그리고 생의 끝에서 돌아보았을 때 해변의 수많은 모래알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가 서로에게 내린 갖가지 평가는 여러 시공간의 언덕을 넘는 동안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무엇보다 과거의 그 인연들은 현재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나의 기억과 응어리일 뿐이다. 그들과 내가 공유한 경험은 각자의 길이 우연히 잠시 겹쳐진 동안 형성된 것일 뿐, 이제는 길의 방향이 너무 어긋나 버려서 남은 생에 내가 그들을 마주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때로부터 나는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상당히 변했다. 그들도 변했을 것이다. 이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버린 그들을 다시 내 옆으로 끌어다 놓는 건 내 기억이다. 모두가 허상이다. 허상인 존재들에게 무엇을 증명할 수 있겠나.
응어리를 땔감 삼아 타올랐던 불꽃이 꺼져가니, 그 불꽃으로 추진했던 이 작업의 속도도 점점 더뎌지고 있다. 그림들을 모아놓고 보니 어쩐지 내가 상상해 왔던 그림집으로 완성될 것 같지도 않다. 고작 이건가? 부정적인 색채를 띠고 있을지언정 내 경험에 기인한 고유한 감정이기에 소중히 여겨왔고, 이 고유한 감정으로 아주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그 결과물이 생각보다 너무 어설프고 초라해서 맥이 빠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다. 나이가 들었고, 자신에 대한 실망감도 분명 크지만 마음만큼은 예전보다 많이 맑아진 것 같다. 복수의 성취보다는 맑아지는 것이 나의 무의식이 바랬던 것이었을까? 맑아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태워야 했던 걸까? 맑아지기 위해서는 나이가 들어야 했던 걸까?
나의 4년 전 목표는 반 실패로 돌아갈 것임이 거의 분명하지만 그래도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작은 꿈이, 아니 희망이(꿈은 너무 거창한 표현 같다) 새로이 움트고 있다. 나는 이 희망이 가슴이 아릴 정도로 반갑다. 4년 동안의 그리기는, 아니 나의 전 생애는 혹시 이 소박한 희망을 만나기 위한 관문들이었을까.
힘을 내서 올해 안으로 반드시 이 작업을 마쳐야겠다. 이 작업을 하는 이상은 기억 곳곳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불씨들을 들쑤시는 일을 멈출 수 없으니까. 그러면 어디선가 또 불씨가 살아나 어렵사리 발견한 이 어린싹을 태워버릴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