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구직 이야기
정해진 직업도 없이 뉴질랜드에 간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의 가장 흔한 반응은 "거기서 뭐 해 먹고살 거야?"였다. 해외살이라는 것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지만 가서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 수 있을지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에서 바로 포기가 되지 않던가. 그들도 궁금했을 것이다. 얘는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 수 있기에 간다는 것인지. 나의 대답은 "뭐든 할 수 있겠죠."였다. 너무 대책이 없어 보이나.
뉴질랜드 이주를 준비를 시작할 때만 해도 코로나가 끝나갈 즈음이었고, 뉴질랜드에 사는 언니 말로는 지금 뉴질랜드는 일 할 사람이 없어서 일자리 구하기가 쉽다고 했다. 그리고 최저시급도 한화로 약 2만 원이라니 어떤 일을 하든 먹고살 수는 있어 보였다. 학생비자인 나는 주 20시간 일을 할 수 있고 오픈 워크비자가 나오는 남편은 주 40시간 정도 일을 할 수 있으니, 직업의 귀천만 따지지 않는다면 생계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안정적인 직업을 놓고, 여기 뉴질랜드에 왔다. 그. 런. 데. 2024년,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코로나가 끝나면서 뉴질랜드에 이민자와 워킹홀리데이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40대 초반의 남편은, 특별한 기술 없이 정말 해외살이 구직에 제일 쓸모없는 사무직 경력뿐이니 구직이 정말 쉽지 않았다. 외노자의 필수코스를 두드려보는 수밖에.
첫 일은, 호박농장이었다. 뉴질랜드 최대규모의 한인커뮤니티 사이트에 구직정보가 뜨자마자 가장 빨리 연락을 했기에 그나마 기회가 온 것이었다. 시급 20불의 캐시잡으로 나쁘지 않았으나, 일하는 시간이 반나절밖에 안 되는 데다(그 이상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못하겠다고 함) 왕복 1시간은 걸리는 거리여서, 남편은 처음 약속된 일주일만 일을 하고 기간을 연장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상품가치 없는 호박을 가져온 탓에 호박전은 실컷 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장점이었다.
첫 일을 쉽게 구해서였을까. 남편은 다른 일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력서를 넣어도 연락이 오는 곳은 거의 없었다.
두 번째 일은 학교청소 일이었다. 이것도, 잽싸게 연락을 했기에 기회가 온 것이었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의 학교 한 곳과 유치원 한 곳을 다른 분과 함께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분은 낮에 본 직장이 있으면서 저녁에 세컨드잡으로 하는 일이었다. 처음에 남편은 손가락이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고, 같이 일하는 분이 한국에 잠깐 방문한 동안 혼자 청소를 할 때는 정말 힘들어 죽는소리를 했다. 하지만, 5개월 정도 되다 보니 익숙해져서인지 요령이 생겨서인지 힘들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보통 저녁 5시에서 8시 사이에 일을 했고, 아이들의 학교 픽드롭에 지장을 주지 않았기에 괜찮았지만 이 일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기에 계속 구직활동을 이어나갔다.
자, 그동안 불발된 케이스를 돌이켜보자.
1. 두 번째 청소 일 전 또 다른 학교청소 일. 면접보고 연락을 기다렸는데, 그만두기로 했던 사람이 다시 한다고 해서(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불발되었다.
2. 집 근처 한인식당 주말 홀서빙. 면접까지 봤지만 아마도 젊은 아가씨에게 밀린 것 같다.
3. 건강식품회사. 꽤 규모 있는 회사여서 일하고 싶어 했는데, 면접하고 트라이얼까지 하고 떨어졌다.
4. 쇼핑몰 안 카페. 새벽에 머핀반죽하는 일이었는데, 면접할 때 사장님이 저녁에 만드는 거 보러 오라고 했는데, 청소시간 겹쳐서 그 시간은 안된다 하니 그 뒤로 연락 없었다.
5. 집 근처 초밥집. 캐셔라고 해서 지원했는데, 주방보조일도 원한다고 해서 면접 가기 전 속성으로 당근채 썰기를 연습하다 손까지 베이고, 그렇게 해서 면접을 갔으나 생각보다 잘한다는 칭찬만 하시고 사장님은 뽑아주지는 않았다.
6. 중국인 사장인 카페 바리스타. 남편은 바리스타로 일하고 싶어서 한국에서 커피를 배워왔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라떼아아트가 매우 중요해서 라테 아트 강습을 받고 있던 중 면접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시원하게 라테아트 망하고 멘털이 털려서 집에 돌아왔다.
7. 여행사 오퍼레이터. 영어조건이 안써있어서 지원을 한 것이었는데, 면접에서 영어를 아주 잘 해야한다고 했다고 한다. 로토루아 지점은 영어를 못해도 괜찮은데, 거기서 일해볼 생각은 없냐고 했다고. 로토루아는 오클랜드에서 3시간 반 걸리는 곳이다.
8. 오클랜드 최대규모의 한인마트.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면접까지 이어지지는 았았다. 여기서 일하려면 SKY정도의 학벌은 돼야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학벌 때문인가?
여기까지는 그래도 연락을 받거나 면접까지는 간 경우이고, 연락조차 받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현지 구직 사이트 trade me 나 seek에서도 이력서를 제출해 보았으나 연락이 온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게 될 남편의 세 번째 직장은 한인마트다. 우리가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두어 번 가보고 직원들의 친절함이 인상 깊었던 곳. 남편이 면접을 보고 와서 그랬다. 그동안은 뽑히기 위해 면접관(주로 사장)에게 잘 보이게끔 대답을 했다면, 여기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솔직하게 말하고 왔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왠지 이번에는 붙을 것 같았다. 남편은 면접 가기 전에는 조금 시큰둥했지만,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곳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왜냐. 너무 한산해서. 그 큰 마트보다는 덜 바쁘고 덜 힘들 것 같아서.
구직이 어려운 이유를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뉴질랜드는 심하게 인맥사회라는 것을. 누군가 말해주기를 통계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회사 내부적으로 아는 사람으로 구인을 하는 비율과, 구직사이트를 통해 구인을 하는 비율이 9:1 정도 된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직을 한 남편을 칭찬한다. 남편은 청소일을 그만두고 다음 주부터 마트로 출근한다. 아직은 신입이라 최저임금에, 마감청소도 여러 번 해야 하지만, 일할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열심히 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