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구직 중
뉴질랜드에서 가장 적응이 필요한 것은 높은 물가이다. 9년 전 뉴질랜드에 왔을 때만 해도 여기 물가는 한국 물가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두 배 이상으로 느껴진다. 특히 공산품 같은 경우는 질도 좋지 않아 '이런 질 낮은 상품을 이 가격 주고 산다고?'라는 생각에 선뜻 어떤 것도 사게 되지 않아 저절로 절약이 되고 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준비가 될 때까지 벌어놓은 돈을 야금야금 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기정화 된 사실이지만, 그 속도가 문제다. 뭐라도 해서 수입을 만들어 그 벌어놓은 돈이 사라지는 속도를 늦추고 싶은 것이다. 한 달 렌트비만 해도 250만 원 정도 나가고 있다. 난 뉴질랜드에 오자마자 위기감을 느꼈다.
학생 신분으로 주 20시간을 일할 수 있어 Reliever (정규직의 빈자리를 메꿔주는 자리를 이렇게 얘기하는 듯하다)로 일하고 싶었다. 유치원교사 자격증을 받는 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니 경험도 쌓을 겸 유치원에서 일하고 싶었다. 먼저 구글맵을 켜고 집 근처 걸어서 30분 거리 이내에 있는 유치원 3-4곳에 CV (이력서)와 Cover Letter (자기소개서)를 이메일로 보냈다.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좀 더 범위를 넓혀 버스를 타고 30분 내로 이동이 가능한 유치원 몇 군데에 CV와 Cover Letter를 또 보냈다. 기다려 보자.
CV를 보내기 시작한 지 열흘쯤 됐을 때, 한 유치원에서 메일이 왔다.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다. 운이 좋게도 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 (걸어서 20분)에 있는 유치원이었고, 채광이 좋고 모던한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집)과 차분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매니저와 인터뷰를 했다. 나는 왜 여기에 왔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이곳 유치원 교육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느꼈는지, 등등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듯 인터뷰를 했다. 나는 다정해 보이는 유치원 매니저도 마음에 들었다. 학생인 나에게 읽어보면 좋을 자료도 소개해 주었다. Police Vet (신원조회, 범죄사실이력조회 같은 거)을 기다려야 하고, 추천인 한 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Police Vet는 학교에 지원할 때, 유치원 실습 시작할 때, 벌써 두 번이나 해봤다. 하지만 그 결과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기관마다 별도로 신청을 해야 하는 것 같았다. 추천인은 같이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들 4명 가운데, 가장 먼저 뉴질랜드에 왔고 유치원에서 일한 경험도 많은 L에게 부탁을 했다. Police Vet는 짧으면 몇 분 길면 최대 3주가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3주나 걸릴 줄은 몰랐다. 그 사이에 나는 다른 유치원에서 첫 번째 실습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메일이 왔다. 아직도 Police Vet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국에서 받은 것도 보내달라고 했다. 한국에서 받은 범죄경력회보서도 보냈다. 이방인인 나는 계속해서 나를 증명해야 했다.
이제 4주가 넘어가고 있다. 유치원의 연락을 기다리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이메일을 보내 아직 Police Vet를 기다리고 있는지 물어봤다. 몇 시간 후 답장이 왔다. Police Vet는 끝났지만 며칠 전 내린 비로 유치원에 홍수가 나서 보수공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유치원 문을 2-3개월 닫게 되었고 그동안은 일자리를 줄 수 없다고, 유치원을 다시 열게 되면 그때 연락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아, 그곳에서 일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 연락 왔던 다른 유치원도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답이었다. 유치원이 문을 닫으면 거기 다니는 애들은 어떡하지? 선생님들 일자리는? 뭐 이런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당장 내 걱정이 우선이었다. 급하게 지금 실습을 하고 있는 유치원 매니저에게 Reliever 지원을 해도 될지 물어보고 지원하기로 했다. 바로 Police Vet를 신청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한국에 나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추천인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나의 멘토이자 언니와도 같은 두 분께 부탁을 드리고 와츠앱에 서로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게 했다. 유치원 매니저도 한국에 계신 두 분도 모두 바쁜 분들인데, 다행히 한국 공휴일인 현충일에 서로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주가 또 지났다. 유치원 실습 마지막 날, 나는 매니저와 인터뷰를 했다. 이제 절차가 끝난 것인가? 아닐 텐데, 계약서에 사인해야 끝일 텐데. 그리고도 한 열흘이 지났지만 아직 연락이 없다.
결과적으로, 나는 3개월 동안 구직 활동을 하고 있고 절차도 밟고 있지만 아직 아무런 성과가 없다. 이제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나 혼자 조급해한다고 되는 일은 없다. 뉴질랜드의 속도에 맞게 느긋하게 기다려야 하나보다. 하지만, 지금도 고민 중이다. 다른 유치원 문을 두드려 보아야 하나. 그냥 이 두 군데 유치원의 연락을 기다려야 하나.
이 글을 쓰고 발행한 날 저녁, 실습을 했던 유치원에서 내일 일 할 수 있는 지 물어보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계약서와 여러가지 관련 서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뉴질랜드 와서 처음으로 나는 8시간 일을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따박따박 월급 받던 나인데, 노동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