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락자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230번, 268번, 299번, 331번, 401번, 탈락입니다.”
안내 방송이 적막을 깼다. 방금 전까지 싸우고 눈치를 보던 사람들도 멈췄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뭐지’라는 표정으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동그라미 여러분! 저희가 화장실에 있는데, 저 엑스 개새끼들이 씨발, 우리 다 죽이려고 공격했어요! 그래서 제 친구도 죽고, 우리 편 여러 명 지금 죽었어요!”
화장실에서 살아남은 참가들이 들어왔다.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있고, 누군가의 옷엔 피가 묻어 있다. 놀라서 다가가다 다들 멀찌감치에서 멈췄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웅성거림이 커진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죽었다는 거야? 자, 여러분! 인원 점검 좀 해 봅시다!"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에 잡힌다고 내가 봐도 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다. 지금 중요한 건 그거다.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사람이 죽었지만, 당장 우리 동그라미가 몇이나 남았는지, 상대 편보다 많이 남아서 게임을 속행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4R 게임을 앞두고 찬반이 50:50이라 내일 재투표를 해야하는 상황이다. 우리 편이 무조건 덜 죽었어야 한다.
나는 <오징어 게임 2>의 440번 참가자다.
연기를 하며 다른 작품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굉장히 새로운, 귀하고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이번 촬영은 7번째 에피소드 ‘친구와 적’의 도입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5인 6각 근대 5종’, ‘둥글게 둥글게 짝짓기’ 게임을 지나, 4번 째 게임을 앞두고 ‘스페셜 게임’이라 불리는 화장실 소동이 벌어졌다. 남은 95명이 벌이는 폭동과 반란의 밤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촬영 초반, 선배님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는 각자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다 왔을까. 얼마의 빚을 가졌길래 여길 들어 왔을까. 화면에 드러나지도 않고, 드러나서도 안되는 전사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상상한다. 100명이 남은 지금까지 계속 동그라미를 누르고 있는 걸 보면 최소 4억 이상, 앞으로 남은 촬영까지 생각해 보면 이 440번 친구는 최소 몇 십억의 빚이 있을거다. 또는 그만큼 큰 돈이 필요하거나. 어떤 인생이었든 참 고단했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 들어온 456명의 참가자 모두가 그렇겠지.
지난 촬영까지 함께했던 선배님 한 분이, 화장실 씬에서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선배님이 연기한 401번 참가자가 죽었다. ‘어? 401번 선배님 오늘 안 오세요?’ ‘지난 주 화장실 촬영에서 죽었어.’ 오늘 아침 셋트장에 들어와 나눈 대화다. 우리는 매일 비슷한 대화를 한다. ‘선배님 언제 죽으세요?’ ‘나? 다음 주.’ 이 곳이 아니면 절대 말할 수 없는 참 묘한 문장이다. 참가자로서는 한 명, 한 명 죽을 때마다 상금이 올라가니 환호를 할거다. 여기있는 모두는 다 생존을 위해 각개전투를 하고 있다. 서로가 적이다.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산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어느 촬영장에서보다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오랜 기간 꼬질꼬질한 초록색 츄리닝을 입고 하루 종일 함께 뒹굴다 보니, 동료 배우들이 한 명, 한 명 사라질 때마다 헤어지는 게 참 많이 아쉽다.
401번 참가자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40대 중반 정도이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뭐라도 해 보려고 애쓰다가 빚을 졌을까.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을까. 아, 너무 전형적이다. 승진에서 자꾸 밀리니 무시하는 사람들 앞에 떵떵거리고 싶어 남은 연차를 긁어 모아 들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기견 보호소를 운영하는데 이런 방법으로라도 돈을 모으지 않으면 강아지들 다 잃는다는 사명감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 아니다. 게임할 때마다 돈을 준다니 단순히 욕심을 내다 얼결에 들어왔으려나.
어쨌든 그렇게 사십 몇 년을 살아낸 사람이 여기 화장실에서 죽었다. 남은 가족들은 이 참가자가 여기 들어와 이렇게 가버린 사실을 알까. 401번을 포함한 5명이 죽었지만, 달라진 건 없다. 아, 남은 참가자들에게 할당될 상금이 커지는구나. 중요하다. 세상이 달라지는 건 없다. 내일의 재투표와 게임을 위해 참가자들은 남은 인원을 세고, 대책 회의를 하고, 각자 살아남을 궁리를 한다.
이렇게 영양가 없는 상상을 하는 사이, 점심 시간이 되었다. 우리 현장은 밥이 정말 맛있다. 많은 배우들이 지금까지 모든 현장을 통틀어 제일 맛있는 밥차라고 인정할 정도다. 하루종일 촬영하려면 힘내야 한다며 콜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와서 아침도 먹었다. 한 공간에 갇혀서 촬영하다보니 시간도 빨리 가서 벌써 또 밥을 먹는다. 살아있으니 또 밥을 먹는다. 나도 살아있고, 440번도 아직 살아있다. 오늘 점심도 역시 맛있었다.
대기실에 모여 잠시 쉬는 틈에, 핸드폰을 들고 복도 구석으로 갔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상 통화로 얼굴이 보고 싶지만, 보안 때문에 카메라에 스티커가 붙어 있어 할 수 없다. 엄마가 스피커 폰으로 받았다. ‘점심 먹었어? 누나는 지금 밥 먹었어.’ 다행히 조금 먹은 모양이다. 엄마가, 동생이 열이 약간 있는데 컨디션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고 촬영하라고 한다. ‘누나가 내일 촬영 끝나고 금방 갈게! 이따가 또 전화할게.’ 동생이 ‘응.’ 하고 대답해 줬다. 어젯밤에 보고 왔는데 또 보고싶다.
지나가던 한 선배님이 물어보셨다. ‘동생이 어려? 애기하고 통화하는 것 같아서.’ ‘네’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니고 웃으며 애매하게 얼버무려 화제를 돌렸다. 생각해 보면 맞다. 동생이 어리진 않은데요, 지금은 애기가 되었어요. 분장실에서는 내년에 촬영할 작품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나도 고민하고 준비하긴 해야하는데, 지금은 440번이나 나나 다를 게 없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 눈 앞의 생존에 집중해야 하는 440번. 나도 그렇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내면 된다. 그게 전부가 되어버렸다. 동생과 짧게라도 통화를 해서 다행이다. 커피도 마시고, 분장도 수정하고, 또 힘내서 다시 촬영장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