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과 119 (2)

by 리베라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스튜디오 밖으로 나왔다. 캄캄한 새벽에 들어갔는데, 나올 때도 캄캄하다. 촬영하면서 스튜디오 주변의 환한 풍경을 본 일이 없다. 오늘 촬영도 고생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초록색 츄리닝을 입고 있다가 나오니 마치 출소한 것 같다는 농담을 하며 선배님들과 헤어졌다.


생각보다 너무 추워서 내일 의상 안에 껴입을 내복과 핫팩을 더 사러 갔다. 너무 따뜻해 보이는 패딩 넥 워머가 보였다. 다음 주 병원 갈 때 되면 날이 더 추워질텐데, 목에 둘러줘야겠다. 장갑고 담고, 내복도 하나 더 담았다. 며칠 전 산책하는데 양말이 짧아 바지 밑으로 맨 살이 보였던 게 기억나, 긴 양말도 하나 담았다. 내가 옷이든 뭐든 살 때마다, 동생은 자꾸 사지 말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청개구리처럼 꾸역꾸역 더 산다. 뭐 더 살 게 없나 한참을 둘러보다가 나왔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핸드폰 카메라의 스티커부터 떼어내 영상 통화를 눌렀다. ‘응. 누나야, 누나! 누나지? 누나 보이지?’ ‘응! 지금 밥도 먹고, 약도 다 먹었어.’ 엄마, 아빠가 옆에서 얘기해 줬다. 동생 표정을 보니 화면 속 내가 보이긴 하는 것 같다. ‘아이구, 잘했다. 너무 잘했다.’ 밥도 다 먹고, 약도 다 잘 먹었다니 다행이다. 내일 보자고 하니, 동생이 ‘응’ 이라고 또 대답해 줬다. 지난 번 촬영하러 내려왔을 땐, 동생이 카톡 메시지에 답도 했는데. 오늘 점심은 뭔가요 물었더니, 동생이 사진을 찍어 보내주며 한참을 얘기했던 기억이 났다. 그게 3주 전이었나. 시간이 빠르다.



새벽 4시, 씻고, 준비하고, 스트레칭도 하고, 대본과 콘티도 보고, 짐도 싸고, 다시 또 스튜디오로 향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진 촬영이다. 폭동과 반란이 이어지는 다음 촬영엔 숙소에 시체가 널부러져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촬영엔 또 침대 곳곳이 비어 있겠지.


처음에 456명이 꽉 차있던 숙소가 생각났다. 세트 초반이라 수백 명의 배우들과 스텝들이 숙소를 꽉 채우고서는,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와 먼지로 굉장히 답답해했던 기억이 났다. 게임이 거듭되며 사람이 줄고, 줄고, 또 줄어, 이제는 어쩐지 휑한 느낌까지 드는 이 공간이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촬영은 몇 달째 진행되지만, 드라마 속 시간으로는 단 며칠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 어려운 게임을 3개나 통과해 살아있는 이 440번 친구는 참 대단한 생존력이구나 싶다가, 사실 다 운이었는데 뭐, 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 440번 친구가 다음 게임에서 살아 남으려면 지금 뭘 해야할까 고민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음 게임이 뭔지 모르니 누구와 작당모의하는 것도, 푸쉬업을 하는 것도 다 무의미하다. 살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초조해하고 있지만, 사실 오늘 잘 먹고 푹 자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굉장히 날카로워 보이는 생과 사의 순간인데, 이 초록색 츄리닝들이 다 너무 작아 보인다. 특수한 게임의 상황이라 그런건지 우리 삶이 다 그런건지 모르겠다.




또 캄캄한 밤이 되어 스튜디오를 나왔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선배님들이 차를 태워주셨다. 피곤한데도 운전해 주시는 선배님들이 감사해서, 촬영도 잘 마쳤겠다,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사실 마음은 집에 가 있었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감사합니다! 다음 촬영 때 뵐게요!’ 단지 입구에서 내려 짐가방을 꺼냈다. 이번 촬영도 잘 마쳤구나, 잘 했다, 생각하며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저 멀리 환한 빛이 보였다.


119다. 119가 왔다. 우리집에 또 119가 왔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려서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이제 막 도착해 체크를 하는 모양이었다. ‘누나 왔어. 누나지? 누나 맞지?’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낮부터 엄마가 계속 카톡을 보내왔었다. 동생이 갑자기 너무 서럽게 몇 번을 소리 내어 울었다고.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러나봐, 괜찮을거야, 농담으로 안심을 시켰지만, 사실 많이 불안했다. 어디가 불편한걸까, 다른 종류의 섬망인걸까, 마음이, 너무 힘든걸까.


하루 종일 양 손과 다리에 작은 떨림이 있었는데, 밤이 될수록 잦아지고 심해져서 119를 불렀다고 했다. 동생은 이미 몇 번의 큰 경련 발작을 한 적이 있다. 케프라를 1년 반 넘게 먹으며 용량을 늘려왔지만, 이제 그것도 잘 안 듣는 시기가 왔다. 공공 119도, 사설 119도 우리에겐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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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아, 우리 00이, 많이 아파서 병원 가는 거 아니고, 미리 가서 주사 맞으려고 가는 거 알지? 걱정하지마. 누나도 왔으니까, 같이 병원 가서 치료하고 오자.’


동생이 눈을 마주치며 ‘응’ 대답한다. 손을 잡았더니, 내 손도 꼭 잡아준다. 안심이 됐다. 더 심한 발작도 여러 번 이겨냈다. 미리 약도 먹고 주사도 맞으면 괜찮을거야. 괜찮을거야. 동생에게 얘기한다. 나에게 얘기한다.


엄마와 아빠를 119에 먼저 태워 보냈다. 촬영 짐은 던져두고, 새로 짐을 쌌다. 핸드폰 충전기, 옷, 담요, 마스크, 기저귀, 손수건, 슬리퍼… 응급실에 들어갈 때마다 짐을 싸서 뒤따라가는 게 늘 내 몫이라, 익숙하게 금방 챙겼다.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모르니, 일단 다 챙긴다. 얼른 가야지. 440번은 동료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지만, 나는 아직 니가 사리지면 안돼. 440번은 내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나는 그래도 뭐라도, 아주 작은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어. 그러니 다 할거야.


이번에도 괜찮을거야. 괜찮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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