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술자리

'곤드레만드레족'

by 김영


1.

클래식은 멜로디와 반주의 수직적 배치인 화성법과 모든 선율이 제각기 수평적인 역할을 하는 대위법이 있다. 화음의 수직적 연결이든 여러 선율이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수평적 연결이든 정해진 구조가 있는 것이 클래식이라면, 연주할 때마다 새로 작곡하고 편곡하고 연주할 때마다 초연(初演)인 음악이 재즈이다. 인생의 다양한 우연성을 표현하듯, 재즈는 수많은 변주와 합주가 있다. 좋게 말해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변주와 합주이지 실은 치열한 전투 장면이다. 색소폰이 자기 이야기에 도취하면 트롬본은 자기도 할 말이 있다고 색소폰의 음을 가로채며 들어오고 드럼은 박자를 맞추며 맞장구를 치고, 베이스는 이해한다는 듯이 어루만진다. 서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충돌하고 타협하면서 불협화음을 화합으로 이끈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춤으로 적나라하게 다투는 것이 있다. 비보이 베틀이다. 비보이가 음악에 맞춰 현란한 팔과 다리의 동작으로 도발적으로 상대 진영을 자극한다. 무릎 스핀과 윈드밀로 텐션을 끌어올리면 상대 진영은 침체된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앨보 스핀, 토마스, 윈드밀의 고난도 동작을 무술을 하듯 대응한다. 이에 질세라 다시 상대팀은 윈드밀, 에어트랙, 토마스, 헤일로, 헤드스핀, 에어트랙, 윈드밀, 백스핀, 헤드스핀으로 이어지는 난도 높은 미친 슈퍼콤보무브를 보여준다. 그들의 도전적인 감정 충만한 춤 동작에는 삶의 불안감을 떨치고 자신만의 힘과 균형과 리듬감으로 분위기로 이끌겠다는 존재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담배연기와 무의미하게 흐르는 음악, 저마다 지껄이는 말들. 그 위에 다시 지르는 말이 얹히며 총칼 없는 말의 전쟁이 시작된다.


술자리에는 자막도, 통역도 소용없다. 읽히지 않고, 통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귀면서 한 잔, 헤어져서 한 잔, 기분이 좋아서 한 잔, 기분이 안 좋아서 한 잔, 더워서 한 잔, 추워서 한 잔, 비가 와서 한 잔, 눈이 와서 한 잔, 일이 진행이 잘 되어서 한 잔, 진행이 안되어서 한 잔, 술 마시다 싸우고, 술 마시며 화해한다. 술 한잔 없이는 어떤 순간도 기념할 수 없다. 핑계는 만들기 나름이다. 기념할 순간은 술기운으로 흐릿해지고, 술이 깬 후 기억은 왜곡되고, 누구의 기억이 더 정확한지 다툰다.


나에게 술은 타인과의 문턱을 무뎌지게 하고, 취함과 동시에 보잘것없는 말더듬이라는 자의식을 잊게 해주는 묘약이다. 첫사랑의 아픈 순간들을 잊게 하기도 하고, 그녀와의 첫 경험이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첫 잔의 쓰디씀은 나의 비루함을 손가락질하지만 연이은 술잔의 달달함은 현재를 잊고 과거 어느 순간의 위대했던 시점으로 나를 이끌어 준다. 불가능은 가능으로, 어색함은 친숙함으로, 때론 불가지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나를 다양한 방법으로 고문해왔던 죄책감을 외딴섬에 유배(流配) 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술은 나에게는 모르핀이고,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주는 최후의 구애(求愛)이고,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를 느끼게 한다. 이런 순간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니들, 그거 아나?/

부원장이 이런 말을 할 때면 취기가 오른 것이다. 얼굴은 붉어져 있다. 술자리에선 친숙하게 다들 형이라고 부른다. 윤희만은 예외다. 그는 꾸부정하게 거북목을 한 체 소주잔의 주둥이를 검지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간다.

/나는 원장한테 감정적으로 말한 적 없어, 간절히 말해왔지. 첫째는, 원장. 도전할 마음도, 의지도 없고, 남의 의견을 경청하고자 하는 마인드도 없어. 물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고, 현실감각도 없다고 보여. 마지막에 한 단어만 추가하자, '매우!'/

간혹 말이 끝날 무렵 한마디를 추가한다. 강조와 환기의 의미다. 그는 어느 술자리나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끊이지 않는 이야기로 사람들의 귀를 붙들어 놓고, 대화의 흥을 돋우는 사람이다. 간혹 마뜩잖은 이야기에 투덜대지만 멈출 때를 아는 사람이다. 그의 목소리는 체구에 비해서 여리지만 귀에 꽂히는 톤이다. 그는 경영학과 출신이지만 지금은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학원에 약간의 지분도 있다고들 한다. 그는 '곤드레만드레족'을 이끌고 있다. 반주로 마시는 술은 약술이라 하고, 상처 난 마음은 술로 꿰매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는 사람은 안다. 그가 마시는 술의 양이 물의 양보다 많다는 것을. 푸석한 그의 몸은 술에 갈증을 느낀다. 탐욕스러운 시커먼 목구멍으로, 차가우면서 뜨거운 것이 넘어간다. 성대는 가볍게 움직이고 흘러가는 길을 따라 불놀이가 한창이다. 얼굴은 잘 익은 살구색으로 변하고, 혈관의 피들은 활기를 되찾는다. 알코올은 정맥에 주입된 마약처럼 온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환호와 정열과 해방감을 전달한다. 마음은 너그러워지고 친밀감은 더해진다. 눈빛은 친절한 카운슬러의 그것이다. 소주는 투명해서 마시고, 맥주는 거품이 아름다워서 마신다고 한다. 좋게 말해 '애주가'이다. 맑고 투명한 그것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순수한 수정 같은 것이 캄캄한 목 속으로 부대끼며 들어간다. 그는 콧등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다시 말한다.

/사람만 뽑으면 다냐! 여기가 뭐 인력회사냐! 그렇게 수학이 좋으면 강사나 하지. 둘 다 왜 하는데. 제갈량과 여포가 있다고 해도 안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맞은편에 앉은 k가 말했다. k는 나와 같은 수학강사이다. 술을 먹으면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할 때가 많고, 취하면 고집이 세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귀가 약간 난청이라 목소리가 크다. 그럴 때면 주변 사람들은 작게 말하라고 손짓한다. k도 부원장과 마찬가지로 거의 매일 술을 먹다시피 한다. 특기는 술 뚜껑을 라이터나 숟가락으로 딴다. 병따개는 쓸모없다. '펑'하는 소리를 즐긴다. 소리만 들으면 샴페인의 펑하는 소리와 같다. 술 취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수선하고, 조용하다 싶으면 졸고 있다. 주변인에 관심이 없는 그가 오늘은 웬일로 말을 거드는 게 신기하다. 오늘도 술자리는 부원장, k, Q, 윤희, 그리고 나이다.

/그래도, 희망을 찾아보자는 거야. 경영자만 바뀌면... 전문적이고 유능한 경영자만 온다면 학원은 날개를 펼칠 수 있어! /

/에이, 부원장님 너무 나가신 거 같은데.../

윤희가 담뱃불을 붙이면서 말한다. 이대 나온 여자다. 학원 첫 출근 때부터 눈에 띄었다. 보이쉬함과 여성스러움의 양극단을 오고 간다. 산머루 같은 까만 눈에 살포시 보조개가 있다. 배시시 웃을 땐 얼굴에 초승달이 뜬다. 웃을 때 이쁜 여자이다. 바로크풍 소용돌이 모양으로 돌돌 말아 올린 파마머리에, 부드럽고 탐스러운 귓불을 가지고 있다. 말할 때 상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다만 그녀의 말투는 거칠고 모난 구석이 있다. 취하면 '시발'이라는 말을 잘 쓴다. 서른 살 정도이다. 어떤 날에는 심하게 찢어진 청바지에 흰 면 티를 입다가도 어떨 때는 숨도 못 쉴 만큼 꽉 끼는 초미니 원피스를 입고 출근한다. 내 시선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여러모로 눈길을 끄는 스타일이다. 유부남인 부원장과 k도, 관심이 있는 듯하다. 나도 물론 관심이 있다. 우리 모두 사랑 앞에선 평등하다. 누구나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에 빠질 수 있다.

/ 윤희야, 잘 들어봐. 이런 학원들, 즉 한 분야만 해오느라, 다른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를 때는 외부에서 새로운 팀을 데리고 와야 돼. 그런 후에 3개월에서 6개월 빡세게 체질 개선을 해야 돼. 근데, 이놈의 원장은 말을 도무지 안 들어. 지 밥벌이는 아직 버틸만하니깐./

부원장은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그의 얼굴은 다양한 표정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주름살이 깊다.

/그럼, 뭘 해야 돼. 형!/

k가 오늘은 딴청 부리지 않고 대화에 집중을 잘한다. k의 관심사는 메이저리그와 프리미어리그이다. 류현진과 손홍민 경기는 빠뜨리지 않고 본다. 그뿐만 아니라 잡기에 능하다. 바둑, 당구, 리니지 게임 그리고 놀음이다. 가정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거 같다.

/아니 뭐, 당장 무얼 하자는 건 아냐. 그냥, 상황이 그렇다는 거지. 너희 제갈량의 적벽대전 이야기 알고 있지? 제갈량이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 조조군에게 불길을 향하게 하여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 말이야. 제갈량이 바람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없을 테지. 다만, 그는 바람이 바뀌는 순간을 알고 있었던 것뿐이었고, 그때를 기다린 거지. 형 말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거지. 사랑도 타이밍이고.. 술이나 먹자! 근데, J야! 사랑해 봤나?/

부원장이 뜬금없이 내게 묻는다.

/형형.. 형은 술만 먹으면 똑같은 걸 물어요.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인데 안 해봤겠어요!/

/아! 생각난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학원을 옮긴 거라고 했지. 술 취하면 예전에 취했을 때 기억이 나가든. 꿈속에서 지난 꿈이 생각나는 것처럼. 근데 형이 말하는 사랑은 뜨거운, 눈물 질질 짜고, 때론 죽이고 싶은 사랑을 해봤냐는 거야./

/네.../

나는 술잔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웬, 존댓말! 하던 대로 말해. 저 인간 또 '진지병'이 도졌구먼. 머리로 하는 그런 사랑 말고. 죽을 거 같은 사랑!/

/저도 해봤어요, 형./

나는 무슨 말인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이네... 내가 J 같은 유형들을 좀 알아.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육체적인 사랑보다 이성적인, 아니,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거든. 몸은 반응이 일어나는데 애써 짐짓 아닌척하거든. 욕망을 드러내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보다 욕망을 감추는 데 에너지를 더 쓴단 말이야./

나는 웬만해선 부원장과는 논쟁을 하지 않는다. 부원장이라는 직함 때문이 아니다. 나에 대해 적의감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고, 상대방의 말의 빈틈을 찾아 집요하게 공격하고, 서로 가시 돋친 말을 하는 것이 싫다. 다음 날이면 후회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원장의 말은 맞는 말일 때가 많다. 나는 약간 거리를 두는 듯한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형형.. 형이 저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게 뭐 잘못된 건가요?/

부원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뒤, 소주 한잔으로 목을 축인 후 말을 덧붙인다.

/아니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을 해야 정신도 따라 움직인다는 거지. 육체는 정신의 발목을 잡는 뻘밭이 아니라 억눌린 욕망의 해방구이다. 둘만의 은밀한 연대감은 편안함과 안정감뿐만이 아니라 열린 성적 접근과 상대방에게 자신을 방기 하고자 하는 욕구를 생기게 해. 그리고, 불꽃같은 강렬한 순간의 기억은 때론 삶 자체를 결정해 버릴 수도 있어. 바로 그 순간이 시간의 존재인 인간이 순간의 존재, 즉 현재를 현재로 느끼는 존재가 되는 거지. 우리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 사이에서 현재를 즐기지 못하거든. 인간의 모든 순간은 불순물로 혼탁해져 있는데 그나마 섹스를 할 때는 순간의 존재로 거듭나. 마치 시간이 소거된 거처럼. 그래서 육체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경멸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욕망 같은 감정은 아무 잘못이 없어. 감정과 이성은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을 때가 좋은 거야. 감정이나 욕망을 이성으로 누르는 것도 한계치를 넘어가면 무너지게 되어있어.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미성숙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거든.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자신의 위선과 책략을 실감할 때가 생겨. 물론 J만의 얘기는 아니고, 형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한 단어만 추가하자, "매우!" /

간혹 그의 말은 비자발적 기억을 생기게 한다. 그럴 때 머릿속 생각은 헤집어지고, 끊어져 있던 감정은 격발 된다. 세상에는 숱한 간극이 있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은 유치하지만 영혼과 육체, 우연과 운명, 자아와 타자, 가벼움과 무거움, 삶과 죽음, 개인과 국가, 현실과 이상, 의식과 무의식 등의 간극은 많은 오해와 오류를 낳는다. 둘 사이를 연결할 가교는 존재하지 않고, 은유로 세상을 보았던 허깨비 같은 날들은 현실이라는 빈틈없는 무기에 의해 무참하게 깨지고, 철석같이 믿던 신념도 무너진다. 육체적 사랑의 가벼움보다는 진지하고 필연적인 사랑이 의미 있다는 믿음도, 허망적 쾌락을 즐기려는 육체의 배신에 무너지곤 한다. 그의 말은, 시대적 통념을 거스르지 않으려던 어중간한 나의 뒤통수를 둔중하게 때렸다. 그는 새 담배 개비를 손가락에 끼운 체 말을 이어간다.

/형은 말이야, 우리 강사들이 학생들한테 노력하면 다 된다고 하잖아. 꿈과 미래에 대해서. 나도 초짜일 때는 진리인 양 'I can do it. just do it now.'라고 신념처럼 부르짖었어./

/노력하면 다는 아닐지라도 그런 거 아닌가요?/

내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우리 알지 않아? 아무리 'I can do it.'이라고 외쳐도 잘 안된다는 거. 잘 바꿔지지 않는 거. 음... 형은 이런 류의 드라마가 정말 싫어. 어떤 눈이 먼 장애인이 있었는데 온갖 어려움을 겪고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그러면 사람들은 뜨거운 감동을 느껴. 나도 손뼉을 치고 싶어. 근데 모든 장애인이 그렇게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되는 거니? 안될 거 뻔히 알면서. 아니면 그 장애인도 할 수 있는데 사지 멀쩡한 너희들은 왜 못하니? 그런 거 아냐?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

그의 말에는 알코올 냄새가 묻어 있지만 질서 정연함은 그대로이다.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 그리고, 애 새끼들이 불쌍해. 그들은 부모가 항상 따뜻하게 대해 준다고 착각해. 간혹 안아주고 그렇게 대하긴 하지. 그들은 '부모나 선생들의 사랑이 끝이 없다'라고 기억을 행복하게 날조해. 부모들은 그들의 욕망을 빼앗고 그 자리에 자신의 욕망을 집어넣은 사람들인데. 부모들도, 아이들도, 서로 사랑한다는 판타지 속에 빠져있어. 만약에 그들이 애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믿어야 하는데, 믿지 못하니 사랑 안 하는 거지. 스피노자 형이 이런 말을 했어.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하면 '나는 네가 말만 잘 들으면 너를 사랑해'라든지 '나는 네가 공부만 잘하면 너를 사랑해" 그런 얘기야. 이것은, 사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한정하지 않아야 부정하지 않는 것인데./

부원장처럼 40대가 되면 인생의 내밀한 부분을 알 수 있는 것인가? 나도 십 년 후면 사십 대이다. 그때까지 학원 생활을 계속하게 될지, 하더라도 퇴물 소리를 듣게 될지, 학원을 직접 운영을 하게 될지, 궁금은 하다. 그때쯤이면 경험과 지식은 차곡차곡 쌓여 절정에 이르고, 지나간 세월의 비극, 슬픔, 애환도 묵묵히 감당하며, 따뜻한 마음과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불현듯 드러나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과 미성숙하고, 무모하고, 모호하고,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는 담배를 어금니로 물고 불은 붙이지 않은 채 얘기를 계속한다.

/강사 아니랄까 봐 또 재미없게 애들 얘기하네. 미안하다. 아참 아까 무슨 얘기 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사랑 얘기요./

심드렁하게 윤희가 대꾸한다.

/아, 맞다. J의 사랑 얘기했었지./

/형, 근데 매일 늦게까지 술 드시고 집에 들어가도 괜찮으세요?/

나는 화제를 돌리려고 짜증이 밴 듯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뭐, 이제는 술 먹는 거 가지고 다투지는 않아. 나도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어쩌겠어. 근데... 너희들이 생각할 때 형은 내 처를 별로 사랑 안 하는 거 같지? 그 반대야. 한때는 죽도록 사랑했지. 지금도 사랑해. 그렇지만 너희들이 보기에, 나도, k도, 매일 술 먹잖아. 가정을 내팽개쳐버린 듯./

그는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연거푸 들이마신다. 들이 마신 연기에 약간의 현기증이 나는지, 연기에 눈이 매운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내게 묻는다.

/J야, 괜찮은 여자 만나면 결혼까지 생각하지?/

/네, 시간이 지나 생활이 안정되면요.../

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대답했다.

/그럴 테지... 지금은 피가 펄펄 끓어서 웬만한 여자가 나타나면, 생활이 안정되었다고 생각되면, 결혼하고 싶겠지. 그렇게 결혼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녀를 사랑하게끔 만든 이유는 언젠가는 싫어지는 이유가 되고../

그의 담뱃재가 소주잔으로 떨어져서 살포시 밑에 쌓인다. 떨어지기 전에 담뱃재 모양은 담뱃갑의 경고 문구 사진과 비슷하게 아래로 휘어져있다.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발기부전!'

/형! 재 떨어졌어요./

k가 말했다. 부원장은 소주잔의 술을 재떨이에 붓고 다시 잔을 채우며 말한다.

/나도 피가 끓어 결혼했지만... 미친 짓인 거 같다. 와이프를 위해서도. 그렇다고 와이프를 사랑 안 하는 건 아냐. 그녀에게 미안할 따름이지. 시발, 형은... 사랑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계급적인 모순이 튀어나오는 관계라고 생각해. 우리네 사랑은 계급을 뛰어넘을 수 없어! 그녀가 외모도 괜찮고 교양 있고 자유로운 행동에 매료된 측면이 있어. 그런데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자유는 잘 살고 있다는 제스처 같은 것이었어. 더 정확히 말하면 소비의 자유, 소비욕망을 실행하는 자유였어. 나는 그녀의 자유를 억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유는 사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해. 그래서 연애는 그렇다 치더라도 결혼은 끼리끼리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서로의 단점을 보완한다는 결혼의 망상은 집어치우고, 자본의 동등함이 먼저 충족되어야 많은 문제가 해결이 돼. 그래야 돈으로 생기는 서로의 위선은 생기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매혹적이고 열정 가득한 낭만적 사랑은 실용적이고 이해관계가 얽힌 서늘한 사실주의로 급변해./

부원장은 술 한잔 마신 후 이야기를 덧붙였다.

/우리가 질리도록 싫어하는 계급이란 것도, 실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동경하잖아. 동경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깊이 동조한다고 생각해. 만약 설국열차에서 바닥을 열었는데 아이가 기계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기차가 멈춰 얼어 죽을 수 있는 것을 감수하고 아이를 구해야 될까, 구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누려왔던 행복이 사라지는데 말이야. 아니면 우리의 삶을 위해 애써 못 본 척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그 아이를 착취함으로써 삶을 유지해온 자신에 분노하고, 그 아이에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다음 역에 내려 설원 속을 가로질러 걸어갈 것인가? 그렇지만 우리의 선택이 무얼까를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좁은 기계실에서 벌어지는 착취를 방기하고 그 사실을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좋든 싫든 못 본척하든 계급을 인정하게 되지. 근데 계급의 속성은 대물림하고 싶어 해. 그래서 우리 같은 하층민은 기를 써도 합류가 불가능해. 그래서 계급의 수렁 속에 파묻혀 있는 거지. 우리는 돈을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할 수단으로 벌지만 그들은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야. 그들은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과시적 여가, 과시적 소비를 하고, 그들의 태도를 우리는 따라가기 바빠. 그리고, 겉으로 볼 때는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들 사이에도 계층이 있어. 오래된 부자들은 존경을 받고, 갑자기 돈을 번 사람을 졸부라고 비아냥거려. 물려받은 부가 자수성가해서 얻은 부보다 낫다는 거지. 마치 유럽인이 미국을 졸부의 나라로 보는 거랑 같아. 문화적으로 천박하고 존경받을 만하지 않다는 거야.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는 개츠비가 모은 돈은 근본이 없는 돈이지만 남편의 돈은 전통 있는 집안에서 내려온 탄탄한 돈이라고 생각하는 거랑 같아. 그래서, 그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사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어해. 자신의 처지가 세팅되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거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개인주의자이고 이기주의자이고 공동체 의식이 없다고 하잖아. 근데 그들에게도 큰 잘못은 없다고 생각해. 단지 서로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데서 오는, 차이 같은 거 아닌가 생각해./

일장연설에 숨이 가쁜 듯 한숨을 크게 쉬고, 거의 타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긴다. 그리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골초이다. 특히 술이 취하면 라이터 불에 담배 대신 머리끝을 그슬린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그슬린 머리칼에 화들짝 놀란다.

/형수님 얘기하다가 갑자기 계급 얘기는 왜 해요?/

k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k는 자기 관심사 말고는 다른 사람의 얘기에 집중하지 않는데 오늘은 의외다. 몸이 안 좋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술을 먹는다. 물론 나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먹는다. 술을 마시면 취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 목적에 이르면, 소극적이고 강박적인 나는, 적당히 풀어지고, 내 안에 있던 무수한 말들이 술을 통해서 밖으로 내보내 진다. 술이 나를 대신해 말하는 것 같다. 또한, 술은 마음속을 용기와 관용으로 물들여 실패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 순간은 인생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물론 술에서 깬 다음날 창피하고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날도 있지만 술과 친구와 음악이 있기에 다시 술을 마실 이유를 고민한다.

/술 취한 거지. 라이터 불에 머리 그슬리는 거 보면 모르냐. 여하튼 형은, J가 경직되어 있는 게 마음에 걸려. 살아온 날을 말해 주는 거 같아 아프기도 하고. 그래서 형은 J가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하나를 선택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딜레마에 빠지지 말고. 그렇게 양 갈래 사이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지 못하면 사람이 위악적으로 변해. 아니면 시니컬하게 될 수도 있고./

나를 걱정해 주는 말인데도 달갑게 들리지는 않았다. 들켜버린 것 같아서다.

/ 형! 많이 헷갈리네요. 형이 형수님에 대해 말하는 거랑 J에 대해 말하는 게... /

지금까지 술만 마시면서 곰곰이 듣고 있던 Q이다. 그는 국어 강사이다. 일찌감치 단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했고 무언가를 아직도 쓰고 있는 듯하다. 글의 소재는 학생운동에 관한 소설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물론 학생운동에 대해 남다른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어쨌든 자신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부럽다. 학원에선 과묵하지만 술자리에서는 간혹 말을 하는 편이다. 냉소적인 기질이 있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따뜻하고 공정한 시선을 가졌다.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에 관대하고, 동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마땅한 이유를 찾아내며, 자신에 대해 남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진지하고 섬세한 사람이지만 어떤 부분은 한없이 무딘 면도 있다. 단점이라면, 약속시간이 지나도 서두르는 법이 없다. 좋게 보면 느긋하고 침착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주위의 사람이나 일에 개입하지 않고 찬찬히 관찰하며, 코너에 몰려서 카운터 펀치를 날릴 때를 엿보는 사람이 아니라 버티면서 유머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모든 그에 대한 묘사를 한마디로 말하면, 소설가답게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형의 형수님에 대한 생각은, 나는 그때 하나의 섬에 도달했고, 평화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하나의 상태를 좋아하게 되자마자, 하나의 꿈이 편안해지자마자, 그것은 어느새 벌써 시들해지고 흐려졌다. 부질없다... 그렇게 들리네요./

/재밌네. 역시 Q는 날카로워서 좋아. 긴장감이 있거든. 네가 한 말에 대해 부정하지 않아. 근데, 너의 부부관계는 안녕하니?/

둘 사이에 소슬한 경계가 느껴진다. 잠시 후 Q는 느릿하지만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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