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3.
다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시끌벅적한 소리에 힐끔 바라본다. 침침한 조명 아래 3팀이 술을 마시고 있다. 한 팀은 낯이 익다. 어렴풋이 학생에 관한 이야기, 학원에 대한 얘기가 들린다. 짐작컨데 그들도 학원 강사인 거 같다. 강사들 옆편으로는 남녀가 있다. 분위기가 묘하다. 남자는 눈에 띄는 실크 넥타이를 정성스럽게 매고 있었다. 선술집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맞은 편의 중년 여성은 진한 화장에 꽤 취해 있다. 남자의 눈길이 시큰둥한 것에 비해 여자의 눈빛에선 욕망이 느껴진다. 둘이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선반 위 tv에선 5.18 망언을 한 정치인의 뉴스가 나오고 있다.
/다양한 생각들이 있지만 저건 좀 아닌 거 같아. 도무지 이해하려고 해도 저들의 생각을 모르겠어. 염치도 없는 인간이야. 정의는 다 어디 갔지?/
나는 격멸하듯 얘기했다.
/언제 저 인간들에게 염치라는 게 있던 적이 있었나? 대한민국 법에, 이 땅에, 과연 정의가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정의와 법치를 주장했던 인간 들치고 독재 안 한 놈이 없어.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는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아. 법은 정의가 아니라 기술이고, 돈의 힘만이 있을 뿐이라고, 형은 생각한다. 법을 지배하는 것은 돈의 힘이다. 명심해라. 형은 순진하게 살았지만 너희들은, 절대, 순진하게 살지 마라!/
흔히들 삶은 태도의 문제라고 한다. 거창하게 태도라는 말의 의미와 무게를 논하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정도는 생각을 할 거 같다. 그들에게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함과 동시에 공동체와의 연대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살면서 저지른 죄에 대해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못할 망정, 아니 속죄는 못할 망정,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다시 상처를 주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한 행위이다. 악인인 것이다. 부원장은 취기가 오르는지 말이 조금 더 빨라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말하는 내용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Q는 NL(민족해방)이야? PD(민중민주)야?/
k가 술을 들이키며 Q에게 물었다.
/그건 왜? 그게 중요한 건가?/
Q는 대꾸하기 싫은 듯 말했다.
/별 뜻은 없어. 그냥 갑자기 궁금한 거지./
k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때, 운동권 진영에서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 투쟁 방향, 북한과의 관계 설정 등을 놓고 NL과 PD가 심각한 충돌을 빚었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도적인 성향의 사람도 있고 선명성이 강한 사람도 있는 거고,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도 다른 건 이해할 만 해. 그런데, 절박한 순간에도 대화와 설득을 해야 하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우리가 폭력을 쓰면 우리들 또한 정당화될 수 없고, 저들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있어. 저쪽에선 두들겨 패고 총까지 쏘는데도 우리가 폭력을 행하는 순간 민주적 저항정신이 사라진다고 하는 인간들 말이야. 근데 놀라운 건 그런 인간들이 극적인 순간에 먼저 배신해버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나 하이에나가 사냥을 할 때는 다들 눈치껏 나름의 역할을 하려고 이리저리 달려든다. 말 못 하는 짐승들도 사냥을 할 때는 의리라는 게 있는데 하물며 인간으로 태어나서 동물보다 못한 짓을 하는 인간들이 있어. 염치도 없어. 그러면서 지가 마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말하고 돌아다녀.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들이야./
나는 Q가 감정을 실어서 빠르게 얘기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술에 취한 건지, 얘기의 소재가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형은 Q의 얘기에 전적으로 동의해. tv에 나오는 저런 정치인들이나 어설픈 기득권들의 행태를 우리는 이해 못 해. 니들은 한번 밟힐 때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들하고, 참고 밟히겠지만, 그건, 너희들이 맨날 밟힌 삶을 살았기 때문이야. 밟혀본 사람은 안다. 한번 밟은 놈은, 한 번으로 안 끝난다. 대가리 쳐들 때마다, 눈깔 마주칠 때마다, 밟는다. 저항 못하도록./
부원장은 술잔을 든 채 마실 틈도 없이 얘기를 이어갔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부당하다고 한 번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나? 한 번도 억울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냐고? 왜 처맞고 계속 당하는지 아나? 그렇게 밟아도. 니들이 아무 짓도 못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계속 밟는 거다. 내가 싫어하는 말이 있어. 소크라테스가 말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 우리는 이런 말을 경멸해야 돼. 악법은 법이 아냐! 악법은 무효인 거야! 부당한 처벌을 받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고 지껄이지 말고, 부당하다고 말하는 거야. 악법은 무효라고 부르짖어야 해! 법은 그냥 기술이야. 법에는 상식과 정의는 없어. 다만 돈의 힘으로 움직여. 힘없는 국민들에게는 법은 신성하니까 지켜야만 한다고 억누르면서 힘 있는 국회의원 놈들은 시도 때도 없이 뜯어고쳐서 누더기로 만들잖아. 시발!/
부원장의 말은 사람들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했다. 열이 나는지 아니면 숨이 가쁜지 물을 벌컥 들이켰다.
/우리가 이렇게 계속 만나는 이유는 정치적 성향이 어느 정도 맞기 때문인 거 같아요. 근데, 저는 점점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있는 것이 지치고, 싫더라고요. 그래 봤자 변하는 것도 없고. 우리가 자주 밤새워 술을 먹는 것도 어쩌면 밑바닥에는 절망감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저것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절망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순간 체념이라는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나는 부원장 말이 옳지만 바뀌지 않는 현실에 희망을 잃은 실망감을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 지쳐서 나자빠지기를 집요하게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우리끼리 갈등하기를 바라고./
Q가 나의 말에 대꾸했다.
/그렇다고 이념적 성향이란 게 쉽게 바뀌나? 다만, 내 생각은, 조금은 가볍게 살고 싶은 거지./
나도 그의 말에 답했다.
/가벼우면 실존적 딜레마에 빠지게 될 텐데./
Q도 다시 대꾸했다.
/무겁다고 다 좋은 건가? 무거움이 족쇄가 될 수도 있는데... 때론, 삶이 무거운 것이냐 또는 가벼운 것이냐를 묻는 순간도 있지만 그 질문이 둘 중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는 것을 묻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삶의 무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량이라는 것도 있을 거 같아. 질량은 물질의 고유한 값이지만 무게는 중력이 작용한 값인 것처럼, 어떤 순간 삶에 중력가속도가 심하게 작용할 때는 무거운 방식으로 살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가볍게 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그 사람의 본질이 바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질량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이유대로 살고, 잘못이 있으면 각자의 방식대로 속죄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내 생각을 말했지만, 술자리의 빈병이 늘어가듯 취기도 차올랐다.
/다들 그러다가 극단에서 극단으로 옮겨가는 인간이 있더라고./
그런 인간들이 누구를 지칭하는 줄은 안다. 나도 경멸하는 인간들이다. Q의 말이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아 긴장감이 들었다.
/쿤데라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는 실존의 문제를 은폐한다'라고 얘기했고, '소설가가 할 일은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벗겨내고 생의 가벼움을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나는 왜 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했다. 아마 지기 싫었던 것 같다.
/쿤데라는 '소설가가 할 일은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벗겨내고 생의 가벼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고 말하면서 '다시 그 속에서 가벼움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삶의 진지함을 직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는데. 물론 그는, 우리가 비장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그만큼의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허무주의적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Q의 약간은 저돌적인 말투에 안주를 먹다 말고 그를 바라보며 나도 말을 이어갔다.
/쿤데라뿐만이 아니라 우정과 동지애 가득했던 카뮈와 사르트르도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적 폭력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이념적 갈등으로 헤어졌어. 공산주의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 사르트르는 소련사회의 압제와 폭력을 진보적 폭력으로 용인하고, 비폭력적인 이상 사회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 불가피하다고 했지만 카뮈는 인간에 대한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는 거라며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 말이야./
Q와는 근본적으로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비슷하다. 다만 선명성과 해결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그의 말을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런 대화가 오히려 긴장감도 있고 나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J의 지적 허영심이 상황을 왜곡하는 거 같기도 한데./
지적 허영심이 내게 있는 건 맞지만 그의 말에 기분은 좋지 않았다.
/물론 내가 지적 허영심이 있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선생들이 거의 조금씩은 지적 허영심이 있지 않나?/
나는 술 한잔 마시고 말했다.
/물론 다들 있지. 기분 나쁘라고 얘기한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 단지 J가 이념에 대한 것을 글로만 이해하는 거 같고 실제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야./
Q는 나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팽팽한 줄이 갑자기 풀어져 느슨해진 느낌이다. 대화는 잠시 멈추었지만 편안한 침묵이었다.
/Q가 어떨 때는 냉정하게 말할 때가 있어. 형은 돼도 안 한 말을 막 하는 스타일이지만 언어의 무늬결과 무게와 질감에 민감한 Q도 이럴 때는 가시가 있는 거 같아./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부원장이 거들며 얘기했다.
/저는 돌려서 말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물론 의미 없이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말이나 행동, 사소한 사건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겨 순식간에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건 알아요. 그런 삶의 부조리와 의외성 앞에서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말은, 그것이 거친 말이든 섬세하게 고른 말이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아무리 나의 의지대로 끌고 가려해도 움직이지 않을 만큼 무겁지만 동시에 말 한마디로도 바뀔 만큼 가벼워서, 내 의지로는 바꿀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에요./
Q의 말을 듣는 부원장의 눈이 반짝였다. 입 끝에 담배꽁초가 간신히 물려 있었고, 가느다란 담배연기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허공으로 흩어졌다. 부원장은 소주 한잔으로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형도 지적 허영심이 대단했었어. 아는 만큼 아는 체하고, 모른 만큼 모른 체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더라고. 어렸을 때 누군가의 '똑똑하구나'라는 말이 듣기 좋았어. 이것이 나의 지적 허영심의 시작이었던 거 같아. 그래서 거짓말도 많이 했던 거 같아. 만약에 우리의 말이 진실만을 얘기하고 거짓말은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린 벙어리나 말더듬이가 됐을 거 같아. 인간은 타고난 거짓말쟁이임을 부정할 수 없어. 군중 속에 산다는 건 거짓 속에 살 수밖에 없다. 유사 이래로 모든 계약은 동등한 적이 없었고, 그 계약은 항상 힘 있는 자와 사기꾼에게 유리했어. 스포츠 선수도 상대방을 속이는 동작을 잘해야지 훌륭한 선수가 되잖아. 지금은 형도 담백하게 살고 싶지만 수다스러움 속에 아직도 지적 허영심이 있더라고. 그래서 스스로 타협했어. 지적 허영심은 있어도 고상한 체하는 속물은 되지 말자고. 그리고 허황된 꿈을 좇지 말자고. 왜냐하면 모든 사기의 시작은, 허황된 꿈에서 잉태되기 때문이야. 그리고 형도 민주화에 소중한 인생을 희생하고, 억울한 죽음이나 수많은 고초를 겪은 또래나 선배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는 있어. 근데, 형도, J처럼 마음이 바뀌는 거 같더라고. 아직도 전쟁위협, 북한 위협으로 국민을 겁박하고, 좌파 우파, 빨갱이 싸움하는 게 넌덜머리가 난다. 더 나쁜 놈은 있긴 한데 어쩔 땐 둘 다 똑같아. 이념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는데 정치하는 놈들만 그 안에서 정권쟁탈 놀이나 하고 있어. 어떤 놈들이 정권을 가지든 우리들 삶에 도움된 적은 없잖아. 그놈이 그놈이여./
그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숨은 고르지 않았다. 들쑥날쑥한 배 덕분에 와이셔츠 단추가 불안하다. 그의 와이셔츠 단추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배를 보면 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다. 그의 배에는 남산 같은 산봉우리가 있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활화산은 아니니까. 양쪽으로 뻗은 완만한 산기슭은 갑자기 바지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다고 바지 속이 궁금하지는 않다. 어쨌든 큰 체구에도 귀여울 때가 있다. 평소에는 얼굴 표정이 풍부하고,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다. 아무리 웃기 싫어하는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웃길 수 있다.
/근데, '키치'라는 말 알지? 방금 '밀란 쿤데라' 이야기하던데./
윤희가 우리의 생각을 짐작해 보려는 듯 물었다.
/오래전에 읽어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중요한 주제였던 건 알아./
Q가 다음 말을 기대하듯이 말했다.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중산층이 상류층의 삶을 동경하여 지녔던 싸구려 복제품을 칭하는 '키치'의 개념을 위대한 작가답게 확장시켰어. 아주 새롭게./
/윤희야! 흥미롭게 들리는데 자세히 좀 얘기해봐! 근데 어떻게 개념을 확대시켰다는 거야?/
부원장은 궁금한 듯 말을 재촉했다.
/좀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일단 '키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관통하는 핵심어라고 생각돼. 간단히 말하면 키치는 획일화된 관념이나 다양성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이야. 예를 들어 이념이나 종교, 정치 같은 것이야. 왜? 인간이 이념이 이끄는 대로 살고, 종교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고, 정치인들이 지껄이는 걸 믿으면서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이야. 그래선 안된다는 거야. 그거뿐만이 아니라 억압된 감정은 모두 키치에 포함돼. tv속의 어떤 광고를 보면, 잔디밭에서 아이들은 즐겁게 뛰어놀고,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파이를 굽고, 한 아이는 호수로 물을 뿌리면 물방울은 빛에 반사되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그런 장면 있잖아. 행복의 표정은 마치 이래야 된다고 말하는. 이런 유치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야. 가족문제도 마찬가지야. 가족은 원래 갈등이 있는 거 아냐? 그런데, 갈등 있던 가족이 오랜만에 만나 눈물로 화해하는 장면을 사람들은 상상해. 이런 유치한 키치적인 감성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야. 남녀 간의 문제도 남자는 이래야 되고, 여자는 저래야 된다는, 나도 모르게 젖어 있는 키치적인 감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야. 근데 키치의 세계를 움직이는 건 감수성이라 쉽지가 않아. 감정이나 감수성은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어. 감정을 이성보다 앞세우면. 논리나 이성은 체계가 있어 변하지 않는데 감정은 변하거든. 나치즘이나 파시즘, 스탈린주의나 일본의 제국주의가 이런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어. 야만성의 상부구조가 감수성이야. /
/좋은데! 이야기가 신박해. 근데 윤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 같은데?/
부원장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말했다.
/그렇게 살려고 의도한 건 없어. 그런데 비슷하게 살고는 있어. 종교는 처음부터 믿은 바 없고, 이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엄마와는 간혹 연락하지만 아버지는 안 본 지 오래되었고, 사랑도 그다지 믿지 않아 겉으로 볼 때는 키치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거 같아. 근데 쉽지 않아. 과연 인간이 키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부원장의 맞장구에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힘든 거야?/
부원장이 재차 물었다.
/인간을 강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게 쉽지 않은 건 맞는 거 같아. 키치를 벗어나려면 철저하게 개인주의로 사는 거야.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내가 내 삶을 통제해야지, 누구도 내 삶을 통제할 수 없어!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면 내 뜻대로 자유롭게 사는 거야. 내 안의 양심과도 절연하고./
/양심은 왜?/
부원장이 재차 묻는다.
/양심을 좀 거창하게 말하면 '너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칸트 선생의 돼먹지 않은 이야기 알지? 우리 인간에게는 본질적인 선한 마음 같은 도덕 법칙이 있다는 말 말이야. 사람들이 그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똑같이 행동해야 하는데 실상이 과연 그런가? 그리고 세상은 선함으로 가득찮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아냐? 양심은 사회의 감시도 모자라 우리 스스로 우리를 감시하게 만드는 스파이 같은 놈이야. 꺼떡 하면 '너는 양심도 없니?'라는 말로 우리의 욕망에 철퇴를 내리고, 집단에서 탈출하려는 한 인간을 집단에 묶어두는 올가미야./
/칸트의 도덕 법칙은 학교에서만 들어봤는데.. 고리타분하지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부원장은 의아스럽지만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글쎄, 똑똑한 철학자이지만 책상에서만 사고한 인간들의 한계라고 생각해. 인간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고, 보편적인 이성이 있을 거라는 걸 나는 믿지 않아. 인간들이 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분으로 태어나 무슨 일을 하는지, 막노동을 하는지, 서명만 하는지 등의 관계 속의 계급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 역할을 하는 거 같아. 마치 내가 부모에게 태어나 가족이라는 관계망 속에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프리퀄이 있어. 갑자기 자신의 생각이 튀어나온 게 아냐.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각자의 구조에 갇혀 있으니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야 된다고 생각해./
그녀의 눈이 빛난다. 내 안에 생각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는 거 같았다. 나도 그녀 말마따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술을 한 모금 마신다.
/윤희야 좋은 얘기 해주어서 고맙다. 음.. 근데, 형이, 요즘에 꽂혀 있는 게 있어./
부원장은 마치 선로 교체기의 작동으로 달리던 기차가 살짝 비껴서 옆 선로로 옮겨가듯 이야기의 소재를 바꿨다.
/뭔데요?/
졸음에 겨워한 k가 관심을 보인다.
/그건 말이야. '중용'이라는 말이야!/
의미심장하듯 부원장이 말했다.
/애걔, 고작 그거예요. 내 얘기는 그런 식으로 널름 정리하고 넘어가고. 고리타분하게 그런 얘기를 해요?/
윤희는 실망이라는 듯 말했다.
/잘 들어봐. 동양고전의 '중용'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형이 생각한 '중용'에 대해서야./
갑자기 부원장의 눈이 커졌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이라는 말을 했어요?/
k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 형님은 인간의 목적이 행복인데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동물과 다른 이성적인 탁월함을 발휘할 때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용이 필요하다고 얘기해. 양극단을 피하기 위해서. 형의 인생을 생각하면 감정 컨트롤을 못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몇 번 경험했거든. 그래서 얻은 교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화내지 말자'였는데 그걸 그 형님은 '중용'이라고 말했던 거야. 그리고, 중용에 이르기 위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고 했어. 한 번 맞춰봐./
부원장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 감질나게 하지 말고 그냥 말해요./
윤희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알았어. 그건 '약간의 재산'과 '우정'이라는 것이야. 가난은 인색과 탐욕과 근심의 근원이기에 가난하면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거지. 그리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한두 명의 벗.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맞는 얘기인 거 같더라고. 다른 철학자들의 가슴에 와닿지 않은 얘기에 비해서는 느껴지는 게 많더라고./
부원장은 신이 난 듯 얘기했다. 대단한 비밀을 말하듯이.
/정리하자면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성적 생활을 통해 '중용의 길'을 실천하고, '어느 정도의 재산'을 형성하고 '진실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소수의 벗이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듣고 보니 중용이라는 게 다르게 느껴지네요./
Q가 일목요연하게 말했다.
/역시 정리를 잘하네. 바로 그거야!/
부원장은 고맙다는 듯이 Q를 바라보았다. 부원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알겠어요. 근데 아직 J선생이랑 끝내지 않은 얘기마저 끝낼게요./
Q가 말했다.
/내 말이 재미가 없구나. 내 나이 되거나 비슷한 경험을 하면 형의 지금의 말이 얼마나 정곡을 찌른 말인지 놀랄 거다./
부원장은 Q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당황해하듯 말했다.
/저도 이미 절실하게 느꼈던 부분이라 듣고만 있었던 거예요. 형이 말한 것은 더 광범위한 얘기지만, 저도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은 갈등이 해소되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꾸준한, 후천적인,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고요. 화내지 않는 것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 지금의 저의 말투나 성격이 이런 노력 덕분인 부분도 있어요. 세상일이 쉽게 결정 나지도 않고, 조급한 결론은 불쑥 튀어나오는 생각지 못한 요소로 정반대의 결과가 나기도 하고, 부정확한 정보로 씻을 수없는 오해를 하게 된 경험도 있어, 가능한 한 결론을 내리지 않거나 유보하려고 해요. 아무리 옳은 것도 화를 내면 전달도 안되고, 상황이 역전되고, 세상이 나를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Q는 조근조근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Q가 주저하는 스타일인 반면, 부원장은 일갈하는 스타일이다. 사뭇 다르다.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시원함을 느꼈다. '중용'이라는 단어의 힘과 신선함이 느껴졌다.
/제대로 이해했구나. 알았어. 너 하고 싶은 얘기 해. 역시 대단해!/
부원장은 만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는 하나라는 어정쩡한 웃음이었다.
/수학선생이니깐 수학에는 정해진 답이 있잖아. 사회를 변혁하는 것도 정해진 답이라고 생각이야./
Q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건 학창 시절의 수학에나 해당되는 얘기야. 수학은 항상 답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 절대적이고 확실하고 엄밀한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아. 이건 나의 말이 아니라 위대한 수학자들의 생각이니 의심은 하지 마. 그런데 우리는 영문도 모른 체 정의와 공식을 외우고 문제를 풀기만 해. 수학에서 어떤 문장은, 참이라고 하면 거짓말이 되고, 거짓말이라고 하면 참이 되는 것도 있어. 우리가 역설이라고 말하는 것이야. 이것뿐만이 아니라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평행선은 만나지 않고,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도이지만 이것이 적용이 되지 않는 기하학도 있어. 그리고, '괴델'이라는 천재 수학자는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없는 문장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어. 이전의 수학자들은 모든 수학적인 문장은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고, 그것들을 계속 찾아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어. 그것이 깨진 거야. 과학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많아.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어떤 법칙이 있다고 하고, 그것을 주류 이론이라고 할게. 그런데 주류 이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정적인 데이터가 나온다고 해서 주류 이론이 한 번에 무너지지는 않아. 주류 이론을 부정하는 데이터가 충분히 나오기 전까지는 과학자는 주류 이론을 계속 믿다가 부정적인 테이터가 넘칠 때 새로운 이론으로 갑자기 움직여.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볼게. 이론을 건물이라고 하고, 이론에 어긋나는 데이터를 지붕에 있는 돌이라고 할게. 계속 지붕에 돌이 쌓이다 보면 집이 무너지는 현상과 같아. 이런 과정을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 이동'이라고 했어.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딱 떨어지는 해답이 없다는 것에 답답해 할 수도 있지만 영화나 소설도 하나의 해답을 인정하지 않을 때 내용이 더 풍부해진다고 생각하는데. 삶도 마찬가지이고./
나는 따분할 수 있는 얘기를 Q의 지적처럼 지적 허영심으로 얘기했다. 그렇지만 수학을 얘기할 때는 이상하리만큼 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아예 진리는 없는 것인가?/
Q는 의아스럽다는 눈빛으로 말을 했고, 나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진리를 탐구하는 거 맞아. 우리가 학창 시절에 수학에 대해 잘못 배워서 혼란스러운 거야. 수학의 쓸모는 확실한 답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유를 묻는 학문이야.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왜 그런 정의를 내리고, 왜 그런 연산 규칙을 따랐는지를 묻는 학문이야. 수학의 발전은,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을 의심하고 질문한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왔어. 그런 '태도'를 배우면 되는 거야. 앞으로 아이들이 살면서 수학 문제보다 복잡한 문제, 끝이 보이지 않는 문제에 닿을 때가 많을 수밖에 없잖아. 그때 피하지 말고, 질문하고, 비판하고, 수긍하는 태도를 배우는 거지. 이게 수학의 진정한 쓸모야. 그것을 이해하면 굳이 앞서서 나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거든. 모두가 앞으로 갈 때 혼자 남아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감동적이고. 느리다고 방향을 상실한 건 아니니까. 결국에는 자기 발견이 중요하거든. 그래야지 나이 들어서도 이 세상을 잘 견디면서 살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리고 세상의 다른 면을 본다면 그는 남들과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어./
간혹, 고리타분한 수학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이해정도를 살피느라, 그물코가 엉키듯 말이 갈피를 못 잡았는데 오늘은 다행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수학이랑 달라 혼란스럽지만 듣고 보니 수학이 그런 기능이 있다면 바람직하고 사랑해야 하는 학문임에 틀림없네. 근데 나는 왜 수학을 그토록 싫어했는지... 하여간 입시 때문에 방향이 잘못 간 거는 맞는 거 같아./
나는 시계를 흘끗 봤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자, 이제 막잔 건배하고, 노래방이나 가자!/
부원장은 많이 참고 있었듯이 소리를 높여 말했다. 평소에는 정신줄을 잘 놓지만 술자리에서는 예외다. 노래방에서는 괴성과 함께 원시부족의 춤을 선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라 한다. 마치 부족에 기쁜 일이라도 생긴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