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 Oct 02. 2023

'카레닌의 미소'

<13화> 에필로그


관성의 법칙


뭐, 이 글은 뻔하디 뻔한 글이다. 관계의 불연속과 자본주의의 교환가치에 짓눌린 자가 뜻하지 않게 길고양이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존재감을 상실한 인간이 고양이와 교감한다는 관성적인 내용이다. 


언젠가 아들집사의 처지가 나방과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낮동안 바위틈새나 나무들 사이에 숨어서 잠을 자다가 저녁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 날개와 다리를 움직이며 땅바닥을 빙빙 돌다가 달을 길잡이 삼아 날아오르지만 가로등을 달빛으로 착각하여 길을 찾다가 그 옆의 가로등을 달빛으로 착각하여 길을 찾다가 또 다른 가로등을 달빛으로 착각하여 다시 길을 찾다가 비로소 올바른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고는 흩날리는 탐스러운 눈송이처럼 가로등 불빛 주변을 밤새 헤매다 몸도 정신도 기진하여 어느 담벼락에 붙어 마지막 숨결이 끊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머무르며 자신이 잘못된 길에서 헤맸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지만 날아갈 힘을 잃고 미세한 발톱으로 버티던 힘도 다하여 불어오는 바람에 몸은 땅에 떨어지고 이리저리 바람에 휩싸이다가 먼지 쌓인 우중충한 구석 빼기로 보내지는 나방. 


하여, 나의 행동이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복기하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신기하게도 고양이의 입장에서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예전에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써먹은 방식이니 이것도 신기할 건 없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아주 식상하고 식상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만약에, 읽다가 '연민'과 '다정'이라는 말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인간들의 말 중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끌리더라. 인간들이 좋아하는 사랑이라는 말이 간혹 폭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 반면, 연민이라는 감정은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고, 은밀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다른 이를 바라보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연민은 다정으로 이어진다. 다정은 상대에 공감하고 그를 향한 이타적 행동이다. 사랑보다 격하지 않은 잔잔한 진동이다. 사유의 대부분이 '연민'과 '다정'과 관련되어 있는 이유는, '연민'과 '다정'은 혹시라도 메마르고 폭력적인 세상을 치유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성장시키고 회복시키는 구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속도의 법칙


내가  집에 처음에 왔을 때가 생각난다. 어느 날, 몇 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국적이라는 말보다 이색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이곳은 키 큰 나무도, 웃자란 수풀도, 바람에 몸을 뒤집어대는 잎사귀도, 미세한 물방울이 흩날리는 연못도, 가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햇빛도, 이 모든 색채의 숨 막히는 어우러짐도 없다. 대신 우리 고양이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있다. 처음으로 일별하는 순간,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등줄기에는 찬물이 끼얹듯 했고, 주변 상황과 분리되어 다른 차원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들이 어느 날 이곳에 와 있었는지는 모른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 당신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구사일생으로 어느 행성에 불시착했는데 느닷없이 에어리언을 대면하는 상황을. 그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왜 오는지, 어떻게 눈치채고 오는지 모른다. 여하튼 다른 생명체를 갑자기 마주친 거다. 온몸의 털이 쭈뼛서고 마른침이 삼켜질 거다. 물론,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안함을 느끼지만 간간이 까닭 모를 불안감이 있긴 하다. 그건 시간과 공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간이 장소에 따라 다르게 흐르고 새로운 분위기를 만든다고 느껴왔다. 그러므로 집사들의 이곳과 작은 숲의 그곳은 늘 달랐다. 이곳의 나와 그곳의 나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곳을 이해하고 느낀 점도 많지만 여전히 이해 안 가는 것이 있다. 어째서 네 발로 균형을 잡고 있는 우리를 두 발로 불안하게 서있는 인간이 지배할 수 있냐는 거다. 그들도 처음에는 네 발로 걷다가 욕망을 참지 못해 앞발로 무언가를 자꾸 잡으려다 손이 된 것인데, 다시 말해 욕망이 신체의 구조까지 바꾸었는데, 그럼 결국 욕망이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게 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이성이라는 대단한 것이 있어서 그렇다고 후렴구처럼 반복해서 말한다. 그들은 그런 대단한 이성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고, 살육을 감행하고, 다른 동물들을 괴롭히고, 행복의 비결과 부자가 되는 책을 찍어 내느라 숲을 파괴하고, 사기꾼에게 유리한 계약을 만들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도덕을 만들었다. 그들 스스로 이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성이라면 나는 결코 인간이고 싶지 않다. 나는 가끔 이성이란 것을 가진 그들이 '나는 안다'라고 확신에 찬 모습을 보일 때가 두렵다. 


이성의 본질이 어떻든, 너희들이 지금 우월한 존재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근데 그 우월함은 특정 부분에서만 우월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 특정 부분을 제외하면 너희들은 결핍투성이다. 한번 생각해 봐라. 혼자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너희 인간의 결핍 한 가지만 얘기해 줄게. 너희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간, 특히 미래라는 시간에 얽매여 있어서 '지금 현재'라는 것의 고귀함을 모른다. 미래를 위해, 목표를 위해, 시지프스처럼 반복하는 것도 모자라 현재를 '없음'으로 만들고 있다. 그걸 너희 자손들에게까지 그대로 물려주고 있다. 삶의 의미가 미래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라면 계속 의미를 갖기 위해 그 목표는 절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표를 달성하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니까. 다행스럽게 삶이 끝나는 순간 목표를 달성하면 그나마 괜찮지만, 좀 쓸쓸하다. 


내 말이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그의 삶을 잠깐 말하겠다.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집과 직장을 오가며 일을 하고, 당연하게도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밤을 새우고, 직장에 허둥지둥 출근해 회의를 하고 기획서를 작성하고, 다시 돌아와 간단한 식사와 빨래를 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직장에 나가고 회식을 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다음날 허둥대며 출근하고 승진을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휑한 얼굴로 돌아와 소파에 기댄 채 잠이 들고, 꽃들이 폭발하듯 핀 길을 지나 출근해서 일하고, 백화점 유리천장을 뚫고 들어온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계절에 맞는 옷을 구입하며 무엇이든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다음날 때로는 농담을 하며 미소 지으며 일하고, 퇴근길 뭔지 모를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 잠이 들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모른 체 일하고, 최신 핸드폰을 구입하고, 일하고, 자동차를 바꿀까 생각해 보고, 일하고, 하릴없이 제 손톱을 세우고 바라보며 결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 다시 일하고, 문득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일하며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와 만나며 이런저런 약속을 하고, 다시 일하고, 집 장만에 대해 생각하고, 일하고, 이제 그녀가 지겨워지고, 다시 일을 미친 듯이 하고, 운 좋게 내게 싫증난 그녀가 먼저 떠나버리고, 하루종일 일하고, 조용하고 고독한 일요일이 지나가고, 늘 그렇듯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여행을 하고, 비행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더 열심히 일하자고 다짐하며 돌아와, 다시 연봉협상을 하고 좌절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간다는 확신 없이 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다가 나를 사로잡은 여행지의 풍경이 내 안에 불러일으켰던 것을 기억해 내고, 다시 일하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연락받고 얼굴은 흰 시트로 덮이고 맨다리는 침대 가장자리밖으로 삐져나온 체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가 그녀를 불길이 할퀴고 집어삼키는 걸 보고, 다시 아무 일도 없는 양 일하고, 베란다 귀퉁이에서 바깥세상을 보고, 다음날 다시 일하고, 어느 날 이메일을 확인하고 경조사에 가서 친구의 갑작스러운 작별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다시 일에 몰두하기 위해 책상으로 다가가고, 다시 출근해 일하고,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잠이 덜 깬 채로 일하러 가고, 자신이 해놓은 일이 소용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나와 세계 사이에 뭔가 삐걱거림을 느끼고, 다음날 또 일하고, 태양이 비치는 날 창밖을 내다보고 저물어가는 마지막 빛이 맞은편 아파트 창문과 마주하는 벽에 던지는 형상을 바라보고, 하루종일 일을 하고, 비 오는 날 밀리는 차 안에서 전조등 불빛에 반짝이는 아스팔트와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에 반사되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고, 다시 지친 몸으로 같은 사무실에 나가고, 어딘가 정답이 따로 있을 거라 믿고 일하고,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일하고, 저녁시간 마주하고 있는 벽에 던진 공이 벽에서 손으로 손에서 벽으로 하얗게 선을 그리는 모습을 보다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고, 멍하니 일하고, 주변과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가라앉기만 하는 마음으로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고, 일하고, 멀리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예전처럼 일을 나가고, 어둠 속에 오래 앉아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걸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일하고, 생각한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지쳐 일하고, 나의 삶이 영원히 창밖에 서성대며 서있을 거 같은 생각이 들고, 일하고, 어느 날 몸이 아프고, 그래도 일하고, 같은 욕망 같은 걱정에 매달려 지내다가 마침내 직장을 떠난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


간혹 내가 고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들도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서 내 흉내를 내곤 한다. 이 집에서 처음 본 집사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무뚝뚝한 얼굴일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풋, 하고 웃기까지 한다. 고양이 한 마리가 그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간 거뿐인데 풍경이 달라진 거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나에게 목표나 희망 따위는 말한 적이 없다. 그냥 다가와서 안고 쓰다듬으며 자신들이 행복해한다. 나도 그들이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면, 촉촉한 비가 우산을 타고 흐르듯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들과 나의 관계를 당신들에게 좀 더 자세히, 그렇지만 식상하지 않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가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했으니 이 글의 마무리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맺는 게 나을 거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카레닌'은 연인관계인 '테레자'와 '토마시'가 기르는 개다. 카레닌이 암에 걸려 죽게 되면서 카레닌에 대해 테레자는 생각한다.


눈앞에는 여전히 나무둥치에 앉아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류의 실패에 대해 생각하는 테레자가 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이미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나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테레자는 카레닌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 더 크다는 것이 아니라 낫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나 토마시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남녀 간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레닌과의 사랑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에도 누가 헤게모니를 잡고 둘 사이를 이끌어 간다. 인간관계에서 작용하는 인력은 항상 그런 것이다. 그녀는 인간 한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테레자는 죽어가는 카레닌을 보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 주는 삶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깨닫는다. 우리 고양이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육체가 죽어도 살아남는다는 고귀한 영혼,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육체와 영혼 중에서 무엇이 우월한지를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내게 쓸데없는 일이다. 그냥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편안해지고 만지고 싶은 것이 전부다. 거기에는 연민, 다정, 공감, 사랑이 신비롭게 결속되어 있다. 그러한 사랑이 가능한 곳은 자연의 세계이다. 그곳은 미래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추측하여 행동하지 않으면서 지금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한다. 그들과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일들은 어떤 일을 일으킬지, 그런 일들이 모여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것을 는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글을 쓸지, 그 글은 순조롭게 진행될지가 궁금하다. 슬며시 나른한 잠  이    아진  다.  그  에     게   꼭         고 싶   은말  이있   는  데    그   건이   런  마 ㄹ   ㅇ  ㅣ  ㄷ    ㅏ .

 " 어      걸        울           라         어     ㅣ       ㄹ           ㅡ        ㅏ         ㅗ    ㄱ      ㄹ        ㄱ              ㅆ           ㅓ "      ㄹ     ㅏ




이전 12화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