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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Oct 02. 2023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12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자동차에 부딪혀 몸이 허공으로 치솟던 순간 머릿속에 그 문장이 떠올랐다. 주위의 풍경들이 한순간에 이지러졌고, 소리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완벽한 단절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고, 생각나지도 않았다. 커다란 캡슐 속으로 머리부터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라는 문장이 두꺼운 헬멧처럼 내 머리를 감쌌다.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을 때 나는 정신을 잃었다. 죽지 않았던 것은 그 문장 덕분이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정말 그 문장이 헬멧처럼 내 머리를 감싼 덕분에 나는 살아날 수 있었다.


ㅡ '김중혁 작가'의 글 중에서




침대 옆 알람시계는 오전 5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팔짱 끼듯 앞다리를 가슴 안으로 접은 채 엎드려 있었다. 아들집사는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끙끙거린다. 언제부턴가, 새벽같이 나갔다가 해가 기울 무렵 돌아왔다. 들어오는 모습은 축 처져 있고, 시큼한 땀냄새와 기름냄새, 파스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잘 때는 거칠게 숨을 쉬지를 않나, 끙끙 앓지를 않나어쨌든, 의 깡다구를 보았다. 그에게는 외딴섬 같은 곳에서, 반쯤은 사교적이고 반쯤은 공격적인 낯선 사람에 대한 불안감, 노동만을 팔려고 했지만 생경한 환경 속에서 감정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프지만 잘 견디어 가더라. 힘들겠지만 나는 그가 하는 일이 맘에 든다. 무엇보다 간단해서 좋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돈을 벌잖아. 인간의 어떤 일들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약관은 어떻다, 세금은 어떻다, 수수료는 어떻다, 세부사항은 또 어떻다, 하며 사람들 정신을 홀딱 빼놓기 일쑤인 일들이 있다. 지나고 나면 이용당한 거 같아 불쾌해지는 일들 말이다.


그동안 그의 얼굴에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내내 떠나지 않는 불편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병에 걸린 환자의 얼굴을 의사가 살피면 짐작이 가듯이, 그런 게 보이더라. 그런 모습 보이기 싫고, 안 괜찮으면서 억지 괜찮다고 얼버무리기도 싫고, 자꾸 떠오르는 유쾌하지 않은 생각을 떨구려, 불안한 걸음으로 공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반쯤 그늘진 벤치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어쩐지, 과거의 모든 시간을 잃어버린 듯하고 살아온 삶에 의미가 없는 듯해서, 멍하니 앉아 있곤 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그의 그림자는 근처 연못가에 가 닿고, 산만한 기억들은 때로 피어나는 철쭉처럼 서로 엉겨 붙어 치고받으며 싸우고, 그는 다시 의지와 무관하게 빠져든 잘못된 세상에서 결국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도 했다. '파스칼 키냐르'가 말한 게 기억난다. '음악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기억하나요, 어느 날, 옛날에, 당신은 사랑하던 것을 잃었잖아요."' 그와 닮아있는 말이다.


사랑했던 가족과 어쩌면 그의 연인이었을, 어쩌면 그의 친구였을 그리운 사람들, 꿈속에서 그들과 얼마나 많은 것을 공유하고 놀라운 대화를 나누었던지. 그러다 꿈이라는 것을 꿈속에서 자각하는, 그리고 꿈과 현실의 위계가 무너지며 스산하게 깨어나서는, 눈을 깜빡일 때마다 셔터를 누르듯 점멸하는 광점들이, 그 앞으로 다가와서는 그를 지나치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순간을 망막에 새겼다.


뭐, 그런 온 당치 않는 생각을 하더라도 자연과 함께 있는 건 괜찮다. 집에 있는 그의 모습은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라도 된 듯했다. 뒤집힌 몸을 일으키려 허공을 향해 가늘고 많은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벌레,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실하고 벌레가 되었으나 완전히 변신이 되지 않아 인간 세계에 여전히 매어있는 벌레 말이다. 


지금은 소설가를 꿈꾸지만 그는 수많은 카이사르를 꿈꿨었다. 카이사르가 된 다한 들 브루투스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카이사르에 대한 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릴 때 그런 적이 있다.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 보이는 찬장의 사탕단지를 향해 의자를 가져다 그 위에서 발을 구르고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던 일. 엉켜버린 인생은 그가 탐해서는 안 되는 걸 탐해서 그런 건 아니다. 매 순간 뭔가와 맞서 싸우는 과정 중에, 단지 운이 안 좋아 불행이 닥친 거다. 그런 불행이 없었다면 글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그도 알 거다. 마치 벌어진 상처 밑에서 새살이 돋아 살갗이 붙는 것처럼 글로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글은, 불행이, 꿈으로만 그리던 것을 실현한 무엇이다. 그리고 불행 다음에 행운이 오는 거지, 뭐. 어쨌든,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탁상공론이나 하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너 자신은 그만 찾고 일단 움직여서 다행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의지가 있고, 산다는 것이다. 움직임은 복잡한 질문은 밀봉하고, 잠시 생각과 감정을 휴면상태로 놓아야 가능하다. 다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지만, 수많은 운석들을 자기 몸에 끌어들여 상처 난 달도 잘만 돌더라. 움직이지 않으면 내부로 향하는 무수한 '할 수 없음'의 회전문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나는 그가 그런 인간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전처럼 멈추고만 있는다면 그는 화석이 되고 말 거다. 몸과 다리와 날개와 심장이 바늘로 고정된 나비박제처럼. 그러니까 움직여, 걸어, 뛰어, 계속가! 그런 그를 보면 새로운 비트가 느껴진다. 가슴이 두근, 하고 두근거린다. 그 비트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아있다는 파동이다. 그런 게 틀림없다. 그에게 나의 아름다운 도약을 보여주고 싶다. 공원의 흙이 발아래 뒤로 밀릴 때, 경쾌하게 움직이는 다리와 팽팽한 종아리와 출렁이는 근육과 얼굴을 보면 흥분될 거다. 일단, 뛰어봐. 뛰다 보면 다 잊힌다. 시간은 빨라지고 몸은 가벼워진다. 다리에 힘을 싣고 땅을 박차 봐. 눈앞의 풍경들은 뒤로 사라져. 과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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