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 Oct 02. 2023

'개연성은 있지만 핍진성이 없다'

<11화> 그의 소설에 대하여


그는 자신의 글이 뭔가 색다른 차원의 진지함을, 더 강하고, 더 격렬하게 건들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감정을 부각해서는 안된다. 아련하고 섬세하고 함축적으로, 감정이 마르지 않으면서 흠뻑 젖지는 않게, 거기에다, 그 모든 것을 유머를 잃지 않고 간결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그의 생각이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영민하지 못한 그의 머리 탓에 매혹적인 이야기, 깊이 있는 사고, 빛나는 묘사력은 바라는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그가 생각하는 간결함도, 그 간결함의 번득이는 칼날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잘려 나갔는지 모른다. 여하튼,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음성학적 재미는 말할 것도 없다. 그냥 풋내기다. 읽다 보면 "에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말하니 마음이 영 개운하지 않다. 뭐 그렇다고 글쓰기를 그만두라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글을 씀으로 다시 그 자신으로 되어가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소설을 처음으로 쓴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읽고 나서다. 젊은 시절 '쿤데라'와 '하루키'는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하는 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참을 수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존재, 의 가벼움'인지가 궁금한 것도 있다. 지적 허영심이 강한 그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아는 만큼 아는 체하고, 모른 만큼 모른 체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었다. 어렸을 때 지나가는 누군가의 '너 참 똑똑 한 아이로구나!'라는 말이 듣기 좋았다. 이것이 그의 지적 허영심의 시작이었다. 젊은 시절은 지적 허영심에 더해, 주목의 대상인 감수성과 무경험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이 공존했다. 그 후, 살아가 동안에도 깊이 없는 수다스러움 속에는 여전히 지적 허영심이 있었다.


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 시작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책도 두껍거니와 처음부터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나오지를 않나, 방금 읽은 내용이 생각이 나질 않아 다시 읽기를 반복하다 포기했다. 역시나 그에게 소설은 무용했다. 뭐, 암튼,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다. 욕망은 벽에 부딪혀 좌절되고, 삶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아니,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삶이 변하고 마음이 변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마음이 변하여 쿤데라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그를 동경하고 흠모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더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고 하던데, 그는 쿤데라의 모든 작품을 읽으며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은 '서머싯 몸'으로, '발자크'로, '플로베르'로, '스탕달'로, '보르헤스'로 바뀌어갔다. 귀가 팔랑귀인 거다.


뭐,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그딴 식이다. 쉼표와 마침표는 언제 쓰는지, 띄어쓰기는 어떻게 하는지, 맞춤법도 모르던, 그가 글을 쓰다니 가상하긴 하다. 종종 하루종일 한 문장도 쓰지 못하기도 하고, 빙빙 도는 생각 속에서 힘들게 찾아낸 문장은 금세 잊어버리고, 비스름하게 찾아낸 문장은 주변과 섞이지 못한 채 처량한 절름발이처럼 보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글을 쓸만한 낌새와 상황 같은 게 있긴 했다. 소설가는 이 세상의 중심이 자신인 사람들이다. 시점만 봐도 일인칭 시점, 말하자면 자신이 주인공이란다. 한발 더 나아가 전지적 시점이라는 거만 봐도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인지 알 거다. 우주의 중심에서 자신을 외치는 인간들이다. 거기에다 소설이 양으로 승부를 내는 직업이니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겠나.


그도 말이 많다. 평소에는 말이 거의 없다가도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가로채며 "야, 안돼, 내가 먼저 얘기할 거야"며 호들갑을 떨며 얘기했다. 그들은 친교를 위해서 술을 마셨다기보다는 밤을 위해 마셨다. 당연히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가 말을 할 때는, 친구들은 강기슭에 좌초하여 배를 뒤집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물고기 표정들이다.


말이 많은 거에 더해, 그는 몰락을 경험한 인간이다. 소설은 성공한 사람들이 쓰는 걸까,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어떻게 성공했는지 자랑하거나 흠결이 있다면 자신을 변명하는 회고록을 쓴다. 소설은 욕망은 있었으나 좌절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온 세상이 성공을 부르짖을 때, 소설은 몰락을 당한, 스스로 몰락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설뿐만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은 거기에 한때 좌절과 절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간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이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착하다는 이유로 잘 살지도 못한다는 걸 알아간다. 또, 사랑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인간관계는 얼마나 살얼음처럼 깨지기 쉬운지, 세상은 압축롤러처럼 우리를 얼마나 짓누르는지를 경험한다.


스핑크스가 환생해 묻는다. 아침에는 욕망이 있고, 오후에는 좌절하고, 저녁에는 이야기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소설이다.


믿거나 말거나. 암튼, 그가 글을 쓴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글의 문제점을 지적 안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런 부분이다.


(1) 개연성은 있지만 핍진성이 없다.


글을 읽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들지만 허술한 인과관계로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함에는 이르지 못한다. 누군가를 소설에 푹 빠지게 해서 '소설은 허구다'를 잊게 할 정도는 아니다.


(2) 글이, 비 내리는 땅처럼 어지럽다.


내용도 어지럽고, 문체도 글마다 제각각이다. 그의 글도, 가만 놔두면 저절로 어지럽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세상처럼, '엔트로피 법칙'을 따른다고나 할까. 그런 거 있잖나. 책상은 가만 놔두면 연필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서류들은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지우갯가루는 사방에 뿌려져 있고, 포스트잇은 이곳저곳 제멋대로 붙어있는 상태처럼, 세상은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엔트로피 법칙 말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왜 하필이면 나야',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라는 팔자나 운명도, 경제는 항상 위기고, 안보는 여전히 불안하고, 군복을 입은 노인들은 도로를 점거하는 세상도, 제멋대로인 엔트로피 법칙 탓이 아닐까.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세상이 있다면, 떨어지던 빗방울은 다시 구름이 되고, 부서졌던 것은 온전해지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얌전하게 컵에 담기고, 모래는 뭉쳐서 바위가 되고, 아래로 떨어졌던 것은 다시 떠오르고, 발사된 총알은 다시 장전되고, 쓰러졌던 병사는 다시 일어서고, 구부러진 허리는 펴지고, 찢어졌던 상처는 다시 아물고, 죽은 이는 깨어나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거다. 게다가, 그가 생각하는 전부를 소설 속에 욱여넣으려 어지러웠던 내용은 정리되고, 술기운과 울분이 느껴지던 문체는 차분해질 거다.  


(3) "이 작품은, 손을 놓을 수가 없는 짜릿함이 있어!"라는 말을 들을만한 글이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파이 이야기', '소립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처럼 사람을 이야기에 꽁꽁 붙들어 놓는 소설처럼 쓰라는 건 아니다. 그런 기대는 아예 없다. 하물며, '적과 흙', '고리오 영감', '마담 보바리', '달과 6펜스', '농담', '불멸', '당신 인생의 이야기', '거미여인의 키스', '속죄', '하얀 성', '올리브 키터리지', '그리스인 조르바', '페스트', '남아 있는 나날', '위대한 개츠비'처럼 '아, 이 소설 좋다'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마치 자전거를 타듯 스르르 미끄러지며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일 만한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가 변변지 못하면 숨어 있는 단어라도 발굴해 그만의 문장이나 미문(美文)이라도 있으면 봐주겠지만 그런 걸 기대한다는 게 애당초 무리다. 그 부분은 이해한다. 문학을 배운 적도 없고, 나이를 생각하면 진정한 늦깎이인데 뭘 더 바라겠나. 이렇게 말하면, 내 말을 또 곡해하는 인간들이 있을 거 같아 덧붙여 설명한다. 내 말은,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시간이 부족할지 모른다는 거다. 인간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있다. 한 인간 안에는 모든 성격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른다. 이것도 시간의 제약 때문에 생긴 거다. 기껏해야 백 년도 되지 않는 세월을 살기에 그가 가진 몇 가지의 성격과 가능성만을 보여주고 사라지는 거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인간들은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참 말도 많더라. 그냥 인생이 짧아 다 보여주지 못하고 간 거다. 그가 만약에 수백 년을 산다면 위대한 작가라는 말을 들었을 거다. 뭐, 암튼 그렇다.


근데 만약 운이 좋아 소설가가 되더라도 그에게도 약간의 부작용이 생길 거다. 소설가들은 자신들의 예술혼이나 자유로운 영혼을 무기 삼아 모든 책임으로부터 도망간다. 대중들은 그의 부재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외려 대중들은 그들의 직업윤리가 부여한 고귀한 소명의식에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더 우러러본다. 그들의 행위는 보다 큰 예술의 숭고함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런 행위들은 그들의 비사회성과 평범함을 감추려는 의도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괴팍한 성격이나 도덕관, 터무니없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가까운 사람들의 비밀이나 상처를 풍자의 제물로 삼는다. 어떤 이들은 그런 것들을 그 작가만이 가지는 개성이라고 하며 작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말한다. 그런 괴팍함 속에서 다행스럽게도 작가의 놀라운 생애나 신기한 경험을 발견하면 독자들은 그를 위한 전설을 짓고는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가 사실주의를 무릎 꿇게 만드는 과정이다. 괴팍한 작가의 개성이 그를 찬미하는 독자에게 어떤 심미감을 주는지, 그들에게 어떤 정서를 구현하는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작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의 비밀을 캐고 싶어 한다. 기발한 착상은 어디에서 구하는지, 글쓰기는 언제 하는지, 글쓰기를 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하는지, 그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는 누구인지 등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작가의 입에서 꾀나 멋지고 창의적인 말을 기다리며 그의 입에 집중한다. 작가들도 그런 기대를 알고 있다. 그들은 뜸을 들이면서 말한다. 어색함과 긴장감을 감추려고 담배도 피우고, 커피도 마시면서 말이다. 어지간히 이력이 나 있는 질문에는 목소리도 가다듬고 강약도 조절하지만 낯선 질문에는 그 스스로 모호함의 미로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러면 비평가들은 그 틈을 파고들며 즐긴다. 보통사람들이 작가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반면에 비평가들은 작가의 창조성을 질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전 10화 '따분한 책 좀 그만 읽지 그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