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잘 때는 쳐다보지 말아 줘. 너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너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몸으로 그리고 살랑거리는 꼬리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왠지 신경 쓰인다.
3. 일어나면 즉시 턱을 만져주거나 머리를 살살 긁어줘. 시키기 전에.
4. 배를 드러내고 누우면 나를 베개삼지 마라. 머리에 힘을 주지 않는 건 알지만 황당하기 짝이 없다.
5. 서로를 위해서 담배는 제발 좀 끊자. 등뒤로 연기의 움직임을 볼 때는 처량맞고, 얼빠진 너의 모습도 보기 싫다.
6. 간혹, 나를 방에 가두는데, 그런 거 하지 마라. 물론, 서로가 숨기는 비밀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갇히는 건 딱 질색이야. 숨바꼭질이라면 어두운 침대밑이나 닫힌 문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느끼지만 말이다.
7. 절망할 이유는 없어, 나는 너에게 계속 이 말을 할 거다. 지금도 혀끝에 그 말이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8. 그리고, 고리타분한 책 좀 그만 읽어. 뭐, 밝고 희망적인 것도 많잖아.
이참에 그가 읽은 책들을 소개할 거다. 흔하디 흔한 이야기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성장통을 겪고, 이념의 갈등이 있고, 욕망의 분출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있다. 뿐만 아니라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가 있고, 엇갈리는 사랑이야기가 있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수치스러운 이야기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 몰래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과의 사랑이야기가 있고, 외모도 성격도 전혀 다른 이복형제의 이야기가 있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고난을 겪는 이야기가 있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이야기가 있고, 천일동안 자신의 죽음을 연장하기 위해 밤마다 한편씩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고, 전당포 노파를 죽인 이야기가 있고, 큰 고기를 잡았지만 고기를 상어 떼에게 뜯기고 마는 노인의 이야기가 있고, 햇빛 때문에 살인하는 이야기가 있고, 계급을 뛰어넘어 출세를 하려는 스무 살 소년이 출세의 정점에서 급전직하하는 사랑과 야망의 이야기가 있고, 퇴학당한 아이의 2박 3일 가출하는 이야기가 있고,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눈과 판단의 오만함으로 벌어지는 폭력의 이야기가 있고,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위험한 동거를 하는 이야기가 있고, 전염병을 피해 교외의 별장에 모인 10명의 이야기가 있고, 전염병으로 도시는 폐쇄되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결혼의 권태에 빠진 한 여인과 두 남자와 사랑 이야기가 있고, 불치병을 안고 태어난 아이를 죽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고, 달빛의 유혹에 빠져 은화의 빛으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가 있고, 가난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린 자가 사랑을 되찾기 위해 불법을 저질러가며 돈을 모아 사랑을 되찾으려 했으나 결국은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있고, 기억이 우리를 배신하고 착각이 생을 행복으로 이끄는 이야기가 있고, 욕망을 억제하며 책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과 욕망에 충실한 삶을 통해 진실을 깨닫는 상반되는 인간의 이야기가 있고, 같은 감방에 수감된 정치범과 성범죄자가 감옥생활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있고,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하여 방 안에 갇혀버린 이야기가 있고, 억압에 맞서 끝없이 투쟁했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대에 산 한 청년의 울분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삶이라는 면도칼의 날카로움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읽으며 사색에 빠져들었다. '죄와 벌'을 읽은 날은 밤새 경찰들에 쫓기는 꿈을 꾸고, '노인과 바다'를 읽은 날은 낮밤을 꼬박 새우며 거대한 물고기와 싸우는 꿈을 꾸었고, '조르바'를 읽은 날은 거칠고 야성적인 내가 자유롭게 뛰노는 꿈을 꾸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은 독창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솜씨 좋게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사건은 같을지 몰라도 다른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들고,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한정된 사슬을 끊고 보편적인 영속성을 만들 수 있다. 소재와 형식은 다함이 없다. 그건 마치 원자가 핵과 전자로 구성이 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빈 공간이 있는 것과 같다. 온통 틈새이다. 원자와 원자 사이에도 빈틈 투성이다. 메꿀 수 있는 공간은 넓다. 이야기의 빈틈을 풍부한 상상력과 세심한 표현력으로 채우고, 다양한 형태의 별 의미 없는 어떤 순간을 가져와서 재량껏 바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면 된다. 역사에는 소수(少數)가 다수(多數)가 되는 혁명의 순간이 비일비재한데 소설이 딱 그렇다.
지금은 '인간실격'이라는 책을 펼쳐놓고 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고 시작된다. 아 뭐, 그답다. 나약하기가.. 다시 한번 말한다. 절망할 이유는 없다.
그는 한 편의 소설을 공모했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을 동경해 온 그였다. 자신이 본 것이나 생각한 것도 글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가 겁도 없이 소설에 덤벼들었다. 시작은 삶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기 위해 글을 쓰면서부터다. 글을 쓰며 하루는 용기를 얻고 하루는 좌절을 하는 것이 하루 건너 찾아오는 열병 같았다. 그렇게 차츰차츰 모여진 글을 엮어 섣부르게 공모까지 했다. 물론, 허튼짓으로 끝났다. 주변에서 먼저 허튼짓으로 끝날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아내가 바람난 것을 알고 있지만 그만이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아는 것과 같다.
공모에 떨어지고 나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읽히지 않고 쓰레기통으로 가고, 불행히도 거기에 자신의 작품도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사위원들도 글을 쓰는 고통을 알기에 꼼꼼히 읽어줄 거라는 기대를 하긴 했었다. 게다가 작품을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를 심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글에 대해 문제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가 자신의 문제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다른 선택의 여지를 지워버리듯이, 글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우왕좌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