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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Oct 13. 2024

10 : 00 AM

"조금 있으면 마감시간입니다, 사원님들!"이라고 '조금만 서둘러 주세요, 관리자'가 소리친다. 오전에는 마감시간이 있다. 대략 11시에서 12시 사이다. 관리자나 사원들이 극도로 예민한 시간이다. 이 시간을 넘기면 상품이 당일 내에 도착할 수 없다. 그날의 일이 헛수고가 될 수 있지만 웬만해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다른 작업을 하는 사원들을 포장라인으로 투입하거나 관리자도 직접 포장을 한다. 그럼에도 시간 내에 마치지 못할 거 같으면 상품의 포장은 잠시 미룬 체, 모든 상품을 미리 스캔하고 송장을 모조리 뽑은 후에 줄지어 서있는 사원들에게 각자 포장할 상품을 나눠준다. 이런 과정에서 험한 말도 오고 간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덕트와 수많은 형광등 아래에서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 소리로 긴장되는 시간이다. 거대한 회색의 창고에서 열리는 사육제라고 할까. 다급한 관리자의 목소리가 그에게 점점 커지며 다가온다. 간격이 좁아지면 음파의 진폭은 커지고 진동수는 증가한다. 그의 가슴은 뛰고, 몸은 불안하게 서두른다. 손에서 달걀판이 휘우청거리며 떨어진다. 달걀 상자에서 끈적거리는 흰자가 줄줄 흐른다. 달걀껍데기 조각들을 하나씩 건져낸다. 손이 미끌거린다. '지금 뭐 하세요, 관리자'가 '지금 뭐 하세요'라고 한다. 그가 일머리가 없긴 하다. 언젠가 이삿날, 액자를 걸기 위해 처음으로 콘크리트 벽에 못을 박으려던 일이 생각이 난다. 왼손으로 못의 몸통을 잡고, 머리 부분을 망치로 내려치자 못에서 불꽃이 튀기며 어딘가로 튕겨나갔다. 다시 못의 몸통을 잡고 달래듯이 살살 못질을 하면서 조금 들어갔다 싶어 망치를 내리쳤지만 못은 다시 어딘가로 튕겨 나갔었다.


그가 이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돈 문제만은 아니다. 끊어낼 수 없는 생각들이다. 그 생각의 절반가량은 타인에 대한 의식이다. 마치, 설탕물에 오무작꼬무작 개미떼가 줄을 지어가듯, 생각들이 연이어졌다. 그의 생각을 공간으로 나눈다면, 한 복판에는 다양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득시글거리며 나가게 해달라고 난리를 쳤댔고, 그 주변을 약간은 긍정적인 생각들이 불안하게 감싸고 있었다. 간혹, 켜켜이 쌓인 부정적인 생각들이 들쑥날쑥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해묵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로질러 뛰쳐나왔다. 그래 본들, 도움은커녕 오만 작자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미심쩍은 미소를 보낸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다. 숫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 긍정적인 무언가를 의식해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내 회한에 사로잡혔다. 더 진흙탕 속으로 더 깊숙이 빠져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설쳐 본들 의식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마치, 카프카의 '굴'에 등장하는 어떤 동물과 비슷했다. 주인공은 스스로 겁쟁이가 아니라고 하지만 언제나 '적'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굴을 더할 나위 없이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매 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야기이다.


'굴'속의 주인공이 고뇌하는 첫 번째 문제는, 안전을 위한 굴을 어떻게 만드냐이다. 입구는 두 개로 만든다. 하나는 정찰 장소로만 생각한 입구이므로 좁아도 상관없다. 그 입구로부터 넉넉히 떨어진 데에다 다른 입구를 판다. 입구는 언제든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새로 만들 수 있도록 위는 단단한 흙이 얇은 층을 이루도록 한 후 이끼를 덮고, 밑에는 푸석한 흙으로 된 입구구멍을 만든다. 입구가 둘이니 위험이 배가 되지만 그런 의심은 일단은 접어둔다. 물론 밖에서 볼 때 구멍이 하나뿐인 것도 있다. 이 구멍은 실은 그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고 몇 걸음만 걸으면 단단한 자연석과 맞닥뜨리는 그런 구멍이다. 이런 꾀를 짜냈다고 뻐기는 건 아니다. 통로는 바깥세상과 긴밀하게 연결해 주는 안전한 길을 지그재그로 만들고, 100미터마다 통로를 넓혀 저장물들을 조금씩 나눌 수 있는 조그만 둥근 광장을 만든다. 제2의, 혹은 제3의 광장은 예비저장소와 부저장소 혹은 그 비슷한 것으로 삼고,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굴의 한가운데 조금 비켜난 곳에 중앙 광장을 만든다. 극도로 위험한 경우, 추적자의 이빨을 느끼게 되지 않도록 밖으로 신속히 나갈 수 있는 '완전히 열린 출구'를 만든다. 물론 이 출구는 주인공에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출구는 적들이 공격해 올 수 있는 취약한 곳이 된다. 이런 모든 일이 힘든 과정이었다. 돌진하여 땅을 다지는 망치인 이마를 몇 날이고 몇 밤이고 땅에다 짓찧었다. 이마가 깨져 피가 낫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 굴이 다채로운 만큼 가능성도 다채롭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든 굴의 멋진 점은 뭐니 뭐니 해도 정적이다. 간혹 작은 동물들이 내는 서걱 소리와 수리를 알리는 흙이 새는 소리 말고는 없다. 이따금씩 굴속으로 숲의 공기가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졌다. 다가오는 노후를 앞두고 이런 집이 있다는 것, 가을이 시작될 때 지붕 밑에 있다는 게 근사했다. 안전이라고는 없고, 어딜 가나 위험한 생활에서 이 정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가슴이 벅찼다. 어린애처럼 몸을 쭉 펴고 이리저리 굴러도 보고, 그러다가 절반은 즐겁게 깨어 있었고 절반은 평화롭게 잠자다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적이 있다. 방금 전, 굴입구를 딴판으로 바꾸어 어마어마한 힘으로 하룻밤에 아무도 모르게 고쳐짓고 이제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든 꿈을 꾸었었다. 깨어서 기쁨과 구원의 눈물이 흘러 수염에 맺혀 반짝였다. 많은 통로와 광장의 둘도 없는 주인으로 평화롭게 잘 먹으며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름다운 시간들의 의미가 이런 것이 아니면 또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 기쁜 순간,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작은 광장에 모아 둔 양식은 대관절 얼마만큼이나 보관하는 게 좋을까, 그리고 이렇게 나누어 놓다 보면 잃어버리는 것도 있고 그것을 확인하려 얽히고설킨 통로들을 줄곧 뛰어 돌아다녀야 하고, 또한 무얼 갖다 놓더라도 그것이 길을 막을 뿐이니, 적에게 쫓김을 당하면 오히려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양식을 모아두면 자신이 소유한 바를 한눈에 알 수 없고, 그 때문에 자부심에 상처가 생길 수도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누구에게나 방해받지 않고 굴에 은밀하게 드나드는 것이다. 이따금씩 바람을 쐴 필요도 있고, 사냥을 하러 밖에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밖은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볼일을 보고 빨리 안전한 굴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굴로 들어가는 사이 뒤에서 적이 그를 덮칠 수도 있다. 그가 사랑했던 굴은 막다른 비극적인 장소가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자신을 감시하는 적이 주변에 있는지 관찰해야 한다. 온 사방, 땅바닥, 나무 위, 공중의 모든 자들이 포함된다. 틀림없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미심쩍으면 며칠이 걸려도 괜찮다. 입구 근처에 살림을 차려 그곳을 관찰하면서 일생을 보내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관찰하면서 아직 자신의 굴이 적에게 발견되지 않은 것에 흐뭇해 할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온갖 의심을 떨쳐버리는 순간, 백주에 곧장 입구를 향해 내달린다.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이끼를 들어 올리기 위하여, 그러나 그를 따라오는 자가 의심스러워 입구를 지나쳐 달려서는 일부러 가시덤불에 처박는다. 어리석다 해도 좋다. 가만히 가시덤불에 처박힌 체, 뒤쫓는 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수룩한 자일 수도 있고, 호기심에 그저 따라오다가 저도 모르게 그와 적대자가 될 수도 있고, 그 어떤 비밀스러운 생물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와 같은 족속으로 굴에 일가견이 있고 그것을 평가하는 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굴은 짓지 않고 그의 굴에 살고자 하는 건달일 수 있다. 그자가 누구일지라도 더러운 욕망으로 입구를 발견하여 이끼를 들어 올리면, 온갖 망설임을 버리고 그자에게 덤벼들어 물어뜯고 짓찧어 갈기갈기 뜯어 남김없이 빨아 마시고 찌꺼기는 다른 양식 더미에 냅다 던져버릴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굴 주변에 서성거리다가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신뢰하여 그의 관찰 임무를 맡길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은 안심하고 내려갈 수 있는 거 아닌가. 그의 관찰자는, 그가 내려갈 때, 그의 뒤를 지켜봐 주고, 위험한 조짐이 보이면 이끼 덮개를 두드려 주는 대신,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그럼으로써 그의 엉덩이 뒤의 모든 문제는 깨끗이 처리된다. 그렇지만 관찰자가 어떤 대가를 넌지시 요구할 수도 있다. 애써 잡은 사냥감이든지, 아니면 최소한 굴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사례로 사냥감을 나누어 주는 거야 그럴 수 있지만 굴을 구경시킬 수는 없다. 굴은 자신을 위해 팠지 방문자를 위해 판 것은 아니다. 만약 관찰자를 굴로 들여보낸다면 함께 내려가거나 관찰자만 들여보내야 한다. 관찰자 혼자만 들여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세상의 무수한 우연들 속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같이 내려가는 것도 가당치 않다. 내려가는 순간 등뒤에서 망을 봐준 장점은 사라진다. 그를 믿고 혼자 내려가도 그가 다른 적과 결탁을 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기묘한 생각이 다시 스쳐갔다. 관찰자의 특이한 동향을 알려줄 수 있는 제2의 관찰자를 두고, 제2의 관찰자를 관찰할 수 있는 제3의 관찰자를 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면 무한히 반복할 수밖에 없다. 생각이 제자리를 맴돈다. 결국에는 모든 존재를 믿거나 모든 존재를 불신할 수밖에 없다. 모든 존재를 믿는다면 애당초에 이 굴은 지을 필요가 없어지고 모든 존재를 불신하면 더 안전하고 완벽한 굴을 만들든지 운명에 맡기던지 해야 한다.


세 번째 문제는, 미심쩍은 어떤 소리에 관한 문제다. 어느 날 생소하기 그지없는, '사각사각'하는 소리에 깨어났다. 끝까지 다 자고 저절로 떨어져 나가는 잠에서 비로소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 사각거리는 소리에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귀 뒤에서 맥박이 벌떡벌떡 뛰었고, 오랫동안 불안감에 목덜미가 움츠러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일단 소리의 정체를 알려고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우선 벽 혹은 바닥에 귀를 대보고, 높은 곳, 깊은 곳, 입구들, 사방, 온 사방에 귀를 대보았다. 어떤 때는 사각사각 소리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끊어졌다 이어지곤 했다. 그동안 굴에 흠뻑 빠져 감시를 소홀히 해서 어떤 조짐을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그런 소리는 어느 정도 집주인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다. 앞서서 말했지만, 굴의 멋진 장점은 정적이다. 문득문득 깊은 잠에서 깨어나 밤이나 낮이나 변함없이 이곳에 가득 깔린 정적을 엿듣고 또 엿듣다가 안심하여 웃곤 했었다. 이 정적을 깬 건 적이다. 누군가는 대상을 참과 거짓으로, 누군가는 선과 악으로, 누군가는 미(美)와 추(醜)로, 또 누군가는 이(利)와 해(害)로 나누지만, 이제, 그에게 세상은 적과 동지로 구분된다. 물론 다분히 정치적인 구분이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질자이다. 수색을 시작한다. 파보아야 할 곳이 만만찮다. 몇몇 군데를 파보았지만 이상이 없다. 적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가 아직 적을 본 적이 없으니 그가 적을 모르듯 적도 그를 모를 것이다. 그 적은 한 마리 일수도 있고 무리를 이루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떠도는 중인가, 아니면 그 자신의 굴을 만들고 있는가? 그가 떠도는 중이라면 혹시 그와 의사소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가 정말로 내가 있는 데까지 뚫고 들어오면, 나는 그에게 나의 양식을 조금 나눠 줄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가던 길을 계속 갈 것이다. 혼자지만 그보다 더 예민한 감각을 지녔을 수도, 그보다 원기 왕성한 존재일 수 있다. 가까이에서 서로의 기미를 느낀 후, 바로 눈앞에 나타나면 둘 다 까무러치듯 정신을 잃고, 누가 먼저고 누가 나중일 것 없이, 아무리 배가 이미 잔뜩 불러 있더라도, 새로운 종류의 허기에 사로잡혀 상대를 향해 발톱과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격렬한 싸움 중에 이게 아니다 싶으면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줄행랑을 치겠지만, 그는 굴의 모든 길과 향배를 다 알고 있다. 구석진 모퉁이에서 그가 지나고 뒤를 방심할 때 그의 이빨은 적의 목덜미를 파고 들것이다. 만약 한 마리가 아니라면 그들이 나를 방해한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작업에 골몰할 확률이 높다. 무리에게 한 줌도 안 되는 나를 먹이로 삼기 위해 오랫동안 작업을 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부로 내쪽으로 올 리는 만무하고 그들이 취한 방향으로 행렬이 지나칠 것이다. 다만 그들이 굴 위를 지나치다 과중한 무게로 굴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굴의 주인공처럼 그도 쾌적하고 안락한 집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가을이 시작될 때 지붕 밑에 있다는 거, 충분한 음식을 저장해 놓고, 이따금씩 숲의 공기가 들어오고, 해가 떨어진 후 차차 보랏빛으로 변하는 하늘을 보고, 어린애처럼 몸을 쭉 펴고 이리저리 굴러 볼 수 있는 그런 곳을 기대했었다. 이제 그는 굴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지 못하고, 매번 딜레마에 빠진다. 


"마감은 잘 끝났습니다. 앞으로 점심시간까지 10분 남았는데 목표량 천 개를 채워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라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관리자'가 말한다. 잠시 후 "저희가 목표치를 돌파했습니다, 사원님들!"이라고 그가 말한다.  


* 이 글은 '프란츠 카프카'의 '굴'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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