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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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그림자가 보인다.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된다. 다만 끔찍한 웃음을 보내고 있는 건 느껴진다. 발걸음을 옮기자 누군가 따라붙는다. 나의 발목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그놈을 떼어놓으려 애쓴다. 빠르게 뛰어가면 갈수록 빠른 속도도 따라붙는다. 달빛이 어스레하게 비추자 그놈은 길쭉해지고, 나는 기진맥진해진다. 그놈의 정체를 알기 위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뒤를 바라본다. 꺼뭇꺼뭇한 윤곽만이 설핏 보인다. 시간이 더 지나자 층위를 알 수 없는 어둠이 종이에 물기가 스미듯 다가왔다. 이제 그놈과 세상은 경계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세상과 하나가 된다. 온 세상이 그놈들 천지이다. 나도 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온 세상이 나를 응시하고, 나도 나를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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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스 잠에서 깬 그는 몸을 뒤척이고, 베개를 고쳐 벤다. 마치, 한창 더운 날, 베개에 얼굴을 뭉그적거리며 차가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눕 듯하다. 여전히 반쯤은 꿈의 흐릿한 여운이 남아있다. 잠시 후에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해 낸다.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소실되는 꿈에게 말을 걸으려 한다. 하루를 마주치기에 만난 친구이다. 따지고 보면 무서운 게 두 가지 있다. 잠들 때와 잠에서 깨어날 때다. 말똥말똥하던 의식을 한순간 집어삼킨 다음, 다시 원래대로 뱉어낸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고, 세계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쥐락펴락하는 무서움이다. 깨어나는 순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 경험들 있지 않나? 여행 가서 깨어보면 당연 집이겠지라고 생각하다가 잠시 후 낯선 분위기에 화들짝 놀라는 상황. 그제야 '아, 여행 왔지..'라고 안심하고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상황말이다.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적응하는 단계에서의 소란 같은 거다. 아무튼 잠에서 깨는 과정은 다른 세상에 한눈을 팔았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잊었던 자신을 기억해 내는 과정이다. 간혹, 잠에서 깰 때 불쾌하게 깨어날 때도 있다.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서다.
그는 손을 뒷머리에 받치고 누워 멀뚱멀뚱 자신의 글을 생각한다. 잠에 깨서 하는 일종의 의식 같은 거다. 저마다 남이 짐작도 못하는 생각과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 남몰래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누군가를 해코지하는 상상을 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자살을 꿈꾸거나, 소설이나 시를 써보거나, 간혹 눈물을 흘리는 거 말이다. 글에 대한 생각은 중간중간 끊기는 영사기를 보듯 이내 길을 잃고 만다. 그의 글도, 가만 놔두면 저절로 어지럽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세상처럼, '엔트로피 법칙'을 따른다고나 할까. 그런 거 있잖나. 책상은 가만 놔두면 연필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서류들은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지우갯가루는 사방에 뿌려져 있고, 포스트잇은 이곳저곳 제멋대로 붙어있는 상태처럼, 세상은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엔트로피 법칙 말이다. 경제는 항상 위기고, 안보는 여전히 불안하고, 군복을 입은 노인들은 도로를 점거하고, 뜨거웠던 사랑은 식어버리고, 기대했던 일은 어그러지고, 럭비공 같은 팔자도 엔트로피 법칙 탓이 아닐까.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세상이 있다면, 떨어지던 빗방울은 다시 구름이 되고, 부서졌던 것은 온전해지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얌전하게 컵에 담기고, 모래는 뭉쳐서 바위가 되고, 아래로 떨어졌던 것은 다시 떠오르고, 발사된 총알은 다시 장전되고, 쓰러졌던 병사는 다시 일어서고, 구부러진 허리는 펴지고, 사랑은 다시 회복되고, 찢어졌던 상처는 다시 아물고, 죽은 이는 깨어나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거다. 게다가, 그가 생각하는 전부를 소설 속에 욱여넣으려 어지러웠던 내용은 정리되고, 대책 없이 변덕스럽고 감상적 문체는 차분해질 거다.
블라인드 사이를 통과한 햇빛은 평행하게 공중에 걸려있다. 그는 손을 뻗어 음악을 틀고 귀를 기울인다. 라라- 디라라 -라라라-라.. 현의 반주에 따라 서정적인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온다. 러시아 색채가 가득 담긴 연주곡이다. 호로비츠의 연주가 봄의 들판에 가벼운 미풍이 불어 풀들은 물결처럼 일렁이고 그 위에 음이 실린듯하다면, 그보다 100년 후에 태어난 임윤찬의 연주는 한겨울 시베리아의 광활한 대지위에 켜켜이 쌓인 순백의 눈 위로 바람이 불고 미끄러지듯 음이 선율을 타고 전해오는 듯하다. 느낌은 다르지만 두곡 모두 낯선 곳을 여행하는 듯 조심스럽게 시작된다. 설렘과 불안감이 묻어있다. 얼핏 들어보면 로맨틱하지만 그 안에는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여있는 화성적인 평화가 있다. 음악을 듣다 보면 복잡한 마음은 하나둘 정리가 되고,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평화롭고 서정적인 선율은 조금씩 고조된다. 피아니스트가 오케스트라와의 협주 없이 기량을 뽐내는 카덴자가 시작된다. 연주자는 심플한 버전과 화려한 버전 중 심플한 버전을 선택했다. 음 하나를 소중히 다루듯, 모든 손가락이 한음한음을 놓치지 않는다. 모래를 뿌려놓은 것 같은 많은 음표를 스피디하면서 가볍게 지나고 있다. 차츰, 피날레를 위해 힘을 축적하고 있다.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듯하다. 조금씩 밀어붙인다. 음이 단단하고 쫀득거린다. 밀어붙이지만 불안하지는 않다. 연주자는 음 하나하나를 기억해서 치는 게 아니다. 정확한 음정을 손에 익힌 다음 머릿속에서 악보를 지워버리고, 가슴으로 치고 있다.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와 싸우는 듯하고, 오케스트라와 교차로 불안하게 느껴진다. 파우스트가 악마와 결투를 하는 것 같다. 연주자의 몸과 머리카락이 들썩이고, 손가락은 한껏 벌어졌다. 피아노의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숨이 차오른다. 몸을 사리지도 않고 겁 없이 달려간다. 연주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보인다. 시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거라 다짐하는 듯하다. 따뜻한 멜로디가 나온다. 고통은 천천히 해결되고, 음울한 분위기는 서서히 극복되고, 화려한 피날레로 향한다.
그의 몸과 머리는 말랑거린다. 이불이 엉켜 있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블라인드 줄을 당긴다. 안개가 걷히듯 천천히 올라가던 블라인드도 그가 만지면 꼬여버린다. 계속 잡아당겨보지만 블라인드는 사선으로 창을 가리고 오렌지 광선은 비스듬히 들어온다. 아이는 유치원에 가고 그녀도 일을 나갔다. 그는 책상 위의 노트북을 켜고 물끄러미 자신의 글을 읽는다.
이렇게 글은 시작된다 :
'우주 대백과 사전'
이 글은 '트랄팔마도'를 경험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밀레니엄 전후에 살았고, 다른 지구인과의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끝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풀린 시간'이라고 부르며 지구로부터 '트랄팔마도어'라는 먼 곳까지 데리고 왔다. 내 허락 없이 나의 삶에 개입했다. 왜 이래야만 했는지 설명을 듣지도 못했다. 얼토당토않은 얘기가 아니다. 전지전능한 시간의 협조와 묵인 아래 가능했다. 내가 트라팔머도인을 처음 만난 것은, 지구의 시간으로 2019년경(내 나이로 말하면 내 몸 위로 14523번의 밝음과 어둠이 지나갔을 무렵이다) 여름날, 마지막 햇빛이 어스레히 비출 무렵이었다. 낮과 밤이 서로를 외면한 채 스쳐갈 무렵, 멀리 몇 채의 먹장구름 속에서 요란한 번개가 흑백필름처럼 먹빛 하늘을 하얗게 가르더니 우르릉 대는 천둥이 고막을 찢어버릴 듯했다. 나는 바람 속 비에 이끌려 공원을 거닐고 있었더랬다. 꽃잎들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파리에 흠뻑 담겨있던 물방울들은 사방으로 튕겨졌다. 비 오는 공원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의 변주곡이었다. 연못에서는 동심원과 동심원이 만나 경계를 흐리고, 비 내리는 땅은 어지럽고, 공기는 끈적이는 관능이 있었다. 아찔한 관능의 순간, 내 의식은 마치 수챗구멍 속으로 소용돌이치면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소용돌이의 격랑에 휩쓸리는 동안, 반투명의 눈앞에는 아버지와 누이의 모습이 지나가고, 이내 나는 소화불량에 걸린 배가 토하듯이 어딘가로 내동댕이쳐졌다. 그곳이 '트랄팔마도'이다.
잠시 옆길로 새자면, 지구에서 나('풀린 신발 끈'이 아니라 '풀린 시간'이다)의 직업은 수학강사였다. 수학강사란 정의(定義)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람들이다. 정답보다 중요한 건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던 사람이다. 물론, 말로만이다. '수학의 본질은 자유'라는 말은 괄호 속에 넣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랬더랬다. 뿐만 아니라, 근대의 시초를 '데카르트'와 '세르반테스'라고 생각하며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의 특별함을 믿었고, 인간 문명의 위대함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뿌듯함과 유일하게 죽음을 이해하는 인간임에 긍지를 가졌던 지구인이었다. 한때는 그랬더랬다. 여기까지는 봐줄 만 하나, 성격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있다. 일단, 말더듬으로 낯선 사람은 피하고,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이 있다. 그리고,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갈림길에서는 항상 머뭇거리고, 다분히 감성적인 데다 모호함을 달고 살았다. 학원일을 빼고는 잘하는 것이 없다. 학원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한다면 사기당하기 딱 맞지만 학원이라는 새장 안에서는 잘난 척한다. 학생들에게, 자기에게도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이 존재했음을 들먹이며, 너희들의 젊음도 한 때라고 질투 섞인 말을 하며,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너희들도 나와 같은 동일한 범주에 묶이는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새장에서만 사는 새들은 새장 문을 열어두어도 도망갈 생각을 안 한다. 날갯짓하는 법을 까먹은 거다. 누군가 새장에서 내동댕이 치면 한쪽 구석에서 가까스로 날갯짓하는 법을 기억하고서 다시 새장으로 들어가려고 새장 주변에서 푸드덕거릴 것이다. 딱 내 처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트랄팔마도어'에 대해 대충이나마 말해야 할 거 같다. 어차피 그곳의 상황을 여러분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재간이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아는 것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다. 선생들이 원래 그렇다. 누군가는 허황된 이야기라며 나를 가벼이 여길 수도 있지만 감수하겠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나을까? 음,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기어 다니지만 그들의 <우주 대백과 사전>부터 시작하겠다. 짐작하겠지만 그들의 과학기술은 지구를 정복하고도 남는다. 다만, 참혹한 싸움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진작에 알기에 그럴 의도는 없다. 그들은 지구를 지켜보면서 '아리까리 행성'으로 명명했다. 1914년과 1939년의 두 번의 잔악한 대청소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그 행성을 보존할 것인가, 붕괴시켜 버릴까에 대해서 0.5초 동안(지구시간으로 백 년 동안이다) 대판 말다툼을 벌렸다. 결과는 1초만 더 지켜보자는 것이다. 물론 '우주 궁전 평의회' 투표의 결과이다. 그럴만한 이유는 있지만 나중에 언급하겠다. 어쨌든 이 결정은 라쿤데력 23929년에 일어났다. 트랄팔마도의 박물관에는 살생을 즐기는 동물의 표본으로 인간이 전시되어 있다. 제목은 '혼돈과 잔인성'으로. 그렇대도 할 수 없지, 뭐.
<우주 대백과 사전> 3979362쪽에서 3994857쪽 사이의 '또 다른 행성'편의 '아리까리 행성'편에는 당시의 '우주 궁전 평의회 회의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우주 행성 파괴 전문위원):(잔뜩 흥분한 어조로) 맙소사! 하늘에서 십자가 모형의 떼거리가 비를 내리자 지표면은 불꽃놀이, 천둥소리, 땅의 흔들림이 시작되고, 수직은 수평으로 나자빠졌다. 비에 맞은 모든 것들은 드러눕고 격한 몸부림을 끝으로 땅과 하나가 되었다. 아주 못돼 처먹은 포유류이다.
별을 그리다(우주 개발 청장) : (체념하듯이) 지구 표면의 도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원숭이 같은 존재 말고는 어느 생명체도 동료와 이웃사촌인 다른 생명체를 못살게 굴고 모든 자연자원을 혼자 써버리지 않아. 그런 생명체는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어. 적어도 생명체는 주변 환경과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지, 증식하면서 모든 자연자원을 아낌없이 써버리지는 않아. 이들은 질병이고 바이러스야. 더 위험하기 전에, 털 없는 원숭이들이 고귀한 행성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전에, 돼지와 말과 소가 더 이상의 모멸감에 몸부림치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돼.
너의 다리가 우리 마을에 서게 하라(우주 유전정보 청장) : (조금 굳은 표정으로) 우주의 역사는 갈피를 잡기 힘들다. 지구인도 농경과 목축을 하면서 먹을 것이 눈앞에 있는데도 참고 기다린 적이 있다. 그리고 지구를 몇 번이고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를 아직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우주의 생태학적 연구에 필요하다. 이런 이유를 제 처 놓더라도 우리 같은 고등한 지적 생명체가 하나의 지적 생명체를 함부로 멸종시켜서는 안 된다.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우주 행성 파괴 전문위원):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들에게 희망을 가져본다는 게. 그들은 '사랑', '휴머니즘', '평화', '관용'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 말은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서로에게 모르는 체하라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수치스러운 행동을 꺼리지 않는 그들은, 자신들 중심적인 관점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 지금은, 그들의 과학기술이 미천하지만 지금의 발전 속도 볼 때 언젠가는 우주의 평화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들이 한번 발을 붙인 곳은 초토화되었다. 그들은 암덩어리고 우리는 치료제이다.
...
이런 격론 끝에 좀 더 지켜보자는 느슨한 결론을 내렸다.
<우주 대백과 사전>은 일종의 전자책이다. 구판이지만 그들이 알아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들어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편집자에 의해 수정되어 문체가 들쑥날쑥하다. 마치 내 글과 같다. 다음은 <우주 대백과 사전>의 '서문'과 '추천사'이다.
서문
우주는 크다. 허벌나게 크다. 지금까지 보거나 상상한 가장 큰 것보다도 정신이 아찔한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더 크다.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다. 이런 무한대의 크기가 덧없이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어찔어찔하다.
......
추천사
몇 번이나 막막한 어둠을 만날 때가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이 길이 맞는 건지, 어느 만큼 계속 가야 할지, 그런 순간 별빛과도 같은 책이다.
<뜨겁게 사랑받을 만한 행성을 찾아다니는 떠돌이들의 모임>
우리는 삶이라는 복잡한 길을 걷고 있다.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안정된 수중생활과 미지의 지상 생활을 놓고 백가쟁명의 기치를 걸고 토론과 비판을 거듭했다. 한 번도 우리의 선조가 태어났던 물속을 떠나지 않은 물고기 선조, 물속과 땅을 오가는 양서류와 파충류 선조, 불안정한 대기와 땅을 견디지 못해 안정적인 바다로 다시 들어간 선조, 비록 그들을 숲과 들과 산과 하늘로 모셔가려는 무수한 시도는 반짝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들의 판단들은 모두 권위로운 판단이었다. 그것이 과거의 반영이든 급진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든 존중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한때 새로운 호흡법을 위한 집요한 교육과 지느러미가 팔다리로 바뀌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무사히 통과하여 단단한 땅을 성큼성큼 걷게 되었다. 이 멋진 발걸음이 우리 종족의 유사성을 차이점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가를 경계로 저쪽과 이쪽을 나눌 수는 없다. 우주 속담에 '우물 안 양서류'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이 우물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하기를 바란다. 우주에 관한 끝없는 고민에 대한 진심어림이 느껴진다. 놀랍도록 튼실한 책이다.
<우주는 허다한 '어쩌면'으로 이루어졌다를 밝히는 은하수 리뷰지>
주해(註解) : 물고기 선조가 물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암초에 달라붙어 파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조개 할아버지 선조를 돌보기 위해서다. 조개 선조 할아버지는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뭍으로 나가겠니, 젊은 너희나 내 걱정 말고 가렴"이라고 말했지만 뿌리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물고기 선조에 대해선 미안한 마음이 비늘처럼 가슴에 박혀있다.
긴 말이 필요 없다. 모든 궁금증은 이 책 한 권이면 된다. 우주의 기원, 진행, 쇠락, 기술, 과학, 행성들의 문화, 삶, 경험, 양식, 신비 하나하나에도 놀랍고 재미있고 깊은 깨닫음을 주기에 흠잡을 데가 없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흔들리지 않는 인내심과 굳건한 믿음으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귀중한 지침서임을 인정한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
<우주 평온한 삶 연합 은하계 남단 연락사무소 5829 지국>
<우주 대백과 사전>은 없는 게 없다시피 하지만 <우주 공동체를 위한 제3소위원회>에서는 개정 신판을 위해 사전조사 중이다. 그런 이유는 25만 광년 떨어진 '돌마니아 행성'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는 <너희들이 모르는 우주에 대하여 말할 거야>가 지혜의 보고인 <우주 대백과 사전>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 공동체를 위한 제3소위원회>는 <우주 대백과 사전>의 신판을 통해 또 한 번 큰 일을 내려고 한다.
'우주 대백과 사전'은 그의 첫 번째 소설의 시작 부분이다. 지금에서야 시시껄렁한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치밀한 말장난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형식은 sf이고, 유머를 넣으려고 노력했지만, 글깨나 끼적이는 이에게는, 마치, 바짓단이 뜯어져 거친 결이 다 드러나 보이는 듯 거슬릴 수도 있다. 결국, 이 글은 의도만 좋았지, 결말도 없이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는 마우스의 휠을 검지로 빠르게 스크롤한다. 글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이야기를 도로 거둘지, 내용을 바꿔야 할지 고민한다. 그는 세상에 아직 나온 적이 없는 글을 쓰려고 한다.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소설이라고 큰소리치고 다닐만한 소설. 그의 글을 읽은 이들에게, 이거, 이 친구, 대단한데,라는 말을 들을만한 소설이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이 오직 픽션일 뿐임을 아는 자들,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쓰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자들은 행복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정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소설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우주는 거대한 패러디다. 삼라만상은 138억 년의 '상호 텍스트'다. 너는 나의 텍스트이고, 나는 너의 텍스트이다. 수천만 페이지를 옮겨 적던 필경사들이 양피지 위를 기어간 자취를 따라 과거로 들어가듯이, 누군가의 글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 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다만,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읽었으면 한다.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의 따사로움과 빛 속 공기의 움직임,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온전히 가두었던 네모난 햇빛이 그를 지나치는 쓸쓸함을 아는 누군가.
그는 일어나 게으르게 네 걸음 옮겨 거실로 들어간다. 햇살이 눈부시고 나른했다. 그렇게 작은 빛의 입자가 태양에서 여기까지 여행해서 온 게 신기하다. 고양이는 유리창을 지나쳐 온 평행사변형의 햇빛 속에 가로놓여 있었다. 꿈속에서 따사한 햇빛을 쬐며 오솔길을 거닐고 있는 듯하다. 그의 움직이는 소리에 일어나 등을 둥근 산처럼 말고, '니아음' 하품을 쩍 하고는 앞발을 길게 앞으로 늘어뜨린다. 발톱은 덜 마른 매니큐어가 서로 붙지 않게 손가락을 최대한 쭉 펴는 모양이다. 이내 다가와 그의 발치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몸을 구른다. 하얀 털실 같은 앞발, 하얀 솜사탕 같은 가슴께, 분홍색 젤리발바닥이 그의 마음을 몽글거리게 한다.
예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읽었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 여기에서 토마시는 테레자의 애인이고, 카레닌은 그녀가 키우는 개다.
'테레자는 카레닌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 더 크다는 것이 아니라 낫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나 토마시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남녀 간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레닌과의 사랑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누군가 헤게모니를 잡고 둘 사이를 이끌어 가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작용하는 인력은 항상 그런 것이다. 그녀는 인간 한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테레자는 죽어가는 카레닌을 보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 주는 삶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깨닫는다. 카레닌은 인간이 말하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모를 것이다. 육체가 죽어도 살아남는다는 고귀한 영혼,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육체와 영혼 중에서 무엇이 우월한지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카레닌에겐 쓸데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냥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편안해지고 만지고 싶은 것이 전부다. 거기에는 연민, 다정, 공감, 사랑이 신비롭게 결속되어 있다. 그러한 사랑이 가능한 곳은 자연의 세계이다. 그곳은 미래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추측하여 행동하지 않으면서 지금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한다. 그와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일들은 어떤 일을 일으킬지, 그런 일들이 모여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것을 그는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글을 쓸지, 그 글은 순조롭게 진행될지가 궁금했다.
그는 창가로 간다. 오렌지 빛이 창문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햇볕으로 따뜻해진 창유리에 손바닥을 대본다. 본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빛 아래서 세상은 얼마나 밝을 수 있을까? 창밑으로 포플러나무의 그림자들이 놀이터를 가로지르고, 그네의 그림자는 흔들리고, 아이들의 목소리는 행복하게 울려 퍼지고, 건물들 사이로 햇빛이 얼씬 얼씬 비치고, 모퉁이 젊은 여인의 블라우스는 살랑인다. 길게 뻗은 그의 그림자는 식탁 의자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자신의 몸을 할짝할짝 핥던 고양이는 무심결에 앞다리를 세운 채 멍하니 창문을 올려본다. 백묵 같은 햇볕이 비스듬히 들어와 거실바닥에 고요하게 내려앉고, 햇볕 속에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먼지들이 있었다. 고양이는 그것들을 넋 놓고 보다가 잡으려 발돋움 친다.
무언가 생각이 나는 듯, 그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서가에서 한 권을 빼낸다. 첫 페이지 짧은 구절을 읽는다.
'P 가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마을은 깊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성이 서 있는 산은 안개와 어둠에 휘감겨 전혀 보이지 않았고, 거기에 커다란 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희미한 불빛 한 점 없었다. P는 국도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허공처럼 보이는 데를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